시(詩)/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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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물끄러미 해변시(詩)/성선경 2016. 9. 2. 14:37
가지를 슬쩍 흔드는 바람은 꼭 나뭇가지에게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지 잎사귀를 툭 치고 지나가는 것은 바람에게 꼭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지 물을 말도 없이 그냥 모른 척 아니 아닌 척 가만히 물끄러미 한 게지 그곳에 가면 해변 가득 물끄러미만 살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앞으로 섬 두엇 물끄러미 정박한 고깃배 서넛 물끄러미 미더덕을 파는 아줌마 하나 물끄러미 긴 참회 끝에 기도가 끝난 머리들이 고개를 들 듯 뒤편 산을 따라 올라가며 집이 대여섯 물끄러미 소나무 네댓 그루 물끄러미 대숲에서 새 몇 마리 포로롱 포롱 가을 하늘이 물끄러미 밤밭고개를 지나 장지연로를 지나 오른편으로 꺾어 땀 흘리는 참숯가마를 왼편에 두고 골프 연습장을 지나 다시 오른편 왼편 다시 오른편 다시 만나러 간다 물끄러미 가끔 허파가 근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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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마포주먹구이시(詩)/성선경 2016. 9. 2. 14:32
마포주먹구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하루 종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선(禪)에 들었다 꿈 속인양 지랄 같은 상사에게 백팔배례를 드리고 늦은 퇴근길 마포주먹구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울컥울컥 주먹 같은 것이 미륵(彌勒)처럼 내려와 기치창검(旗幟槍劍)으로 개벽(開闢)하는 날 마포주먹구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물 좋은 마산의 무학소주 한 잔이면 마음도 가을이라 단풍잎같이 물들어 주먹을 펴고 네 박자 세 박자 장단 맞추는 마포주먹구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명태전 동래파전 막걸리집 지나 오뎅탕 은행꼬치 생맥주집 지나 울컥울컥 개벽 치려 온 미륵같이 주먹 서는 날 마포주먹구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굵은 소금을 메밀꽃같이 뿌려서 딸랑딸랑 봉평장 가는 당나귀같이 연탄 화덕 앞에 길손을 모아 옹기종기 한 점씩 살을 나누고 캬 -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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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우수(雨水)시(詩)/성선경 2016. 9. 2. 14:28
우리 봉창 하나씩 냄 세 내 스스로 괴로울 때 그니는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따뜻이 생각하며 우리 봉창 하나 냄 세 봄비에 젖은 수양버들 머리칼 흔드는 우수(憂愁), 그 긴 겨울 해를 등지고 긴 그림자에 이끌려 허이 허이 돌아올 그 기다림을 위해 우수(雨水)엔 우리 봉창 하나 냄 세 따뜻한 기다림이 마을 어귀까지 조용히 졸고 있는 그러다 그리움에 지쳐 스러지는 새벽별이 보이는 따뜻한 봉창 하나 우리 냄 세 내 그리고 그리다 지쳐 잠들었노라 잠든 이후에도 두고두고 기다렸노라 마을 어귀 만장처럼 묶어둔 노란 손수건같이 내 따뜻한 마음 불빛으로 밝게 빛날 이참에 우리 봉창 하나 냄 세 내가 가진 것은 다만 이뿐 새벽잠을 깨울 새소리를 듣는 그런 것 말고 어른어른 새벽안개처럼 그니 그림자 비칠 우수(雨水)엔 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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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돼지국밥을 위한 기도시(詩)/성선경 2016. 9. 2. 14:25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삼천 원짜리 돼지국밥 앞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참 맛있겠다고 입맛을 다시며 눈웃음을 칠 수 있는 사람 내 앞의 사람에게 고기 한 점이라도 더 권할 수 있는 사람 새우젓을 권하며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참 좋아하셨다고 아주 오래된 전설을 얘기하듯 말할 수 있는 사람 내 앞자리 어른의 좀 길다 싶은 잔소리도 아직은 들을 만하다고 돼지국밥 한 그릇 잘 먹은 사람처럼 다 듣고도 한 오 분쯤 더 땀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오뉴월 한증의 날에도 국밥 한 그릇을 잘 먹고 나면 삼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고 얼음조각이 둥둥 뜨는 냉수 한 컵 잘 마신 것처럼 강바람이 불 듯 시원히 웃을 수 있는 사람 내 아들과도 다시 오고 싶다고 주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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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소금 두 가마니시(詩)/성선경 2016. 8. 3. 17:28
내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 모두 말리면 소금 한 가마니 내 살아남기 위해 흘린 땀 모두 말리면 또 소금 한 가마니 이제 너희 둘을 위해 모두 물려주겠다. 귀찮다 말고, 너무 작다 말고 받아라. 늙은 보부상 같이 헐떡이며 살아온 내 생애는 모두가 부끄러웠으나 그래도 이 둘만은 덜 부끄러우니 이제 너희 둘을 위해 물려주겠다. 소금가마니를 척 멍석에 펼쳐 놓으면 내 무슨 자서전이 필요하며 내 무슨 행장이 필요하랴 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두 귀 너희에게 있으니 이제 이 소금 두 가마니 너희에게 물려주겠다. 소태같이 짜거나 곰보같이 얽었을 이 소금 두가마니 아들아 그리고 딸아 이제 다 너희들 꺼다. (그림 : 김종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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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여기 모란시(詩)/성선경 2016. 8. 3. 17:22
웬만하면 한 번 돌아보지 그래, 웬만하면 한 걸음 멈추고 되돌아보지 그래,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저 폭포도 단오하게 휙 떨어져 내리기 전 한 번쯤 멈칫하듯이 웬만하면 한 번 되돌아보지 그래, 잠시 할 말을 잊었을 때 머리칼을 쓸어 올리듯이, 봄이 이미 왔더라도 이 추위 잊지 말라고 꽃샘의 바람이 불듯이. 웬만하면 한 번 웃어주지 그래, 저 악보가 오선지를 떠나 음악이 될 때 소리통을 한 번 쿵 울리고 더나는 것처럼 웬만하면 한 번 웃어주지 그래, 이미 꽃 진 자리에도 슬쩍 배추흰나비가 잠시 쉬었다 가듯이 웬만하면 웃어주지 그래, 잠시 구두끈을 고쳐 매듯이. 영영 고개를 돌린 이여 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대여 웬만하면 참 웬만하면. (그림 : 정서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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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봄, 풋가지行시(詩)/성선경 2016. 8. 3. 17:08
도야를 지나 우천, 우천을 지나 중대, 중대를 지나 칠월, 칠월 지나 계팔, 계팔을 지나 미실, 미실을 지나 풋가지, 솔가지 물오른 풋가지 간다. 외로 굽어도 한 골짝, 우로 굽어도 한 골짝, 눈썹 고운 여자를 데리고 첩첩산중. 여기도 한세상 숨어 있고, 저기도 한세상 숨어 있고, 고사리 순이나 꺾으며 한세상 숨어 있고, 넌출넌출 실배암 기어가듯 칡넝쿨 자라는 소나무 아래 장기판이나 놓고 여기도 한세상 저기도 한세상. 여기 장 받아라 초나라가 이겨도 한나절 한나라가 이겨도 한나절. 눈썹 고운 여자랑 때늦은 점심상에 상추쌈이나 한입 불쑥 불쑥 움켜 넣으며 한세상 살았으면, 도야를 지나 우천, 우천을 지나 중대, 중대를 지나 칠월, 칠월 지나 계팔, 계팔을 지나 미실, 미실을 지나 풋가지, 솔가지 물오른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