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영남
-
김영남 - 구절리 아라리시(詩)/김영남 2017. 12. 17. 13:57
저렇게 맑은 강물을 거슬러본 사람만 오지의 슬픔에 일찍 도착할 수 있으리 구절리행 비둘기호 열차가 험한 계곡을 돌 때 길게 읊고 가는 정선 아리랑, 그 한줄기 붙들고 산모퉁이 돌아보니 '숙'이라는 이름이 그리워서 나도 못 살겠네. 그러나 이곳 텅 빈 역을 명상해보지 않으면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구절리란 얼마나 외로운 길 데려온 마음이었는가를, 이 마을은 또 산비탈이얼마나 거칠게 숨쉰 탄광촌이었는가를. 나는 구절리를 닮은 사랑 하나 꺼내보겠네, 철로변 억새꽃으로 종착역 같은 여자를 흔들면서, 아니, 정선 아리랑 애정편을 첩첩 산등성 뒤로 넘기면서. (그림 : 김지환 화백)
-
김영남 - 여량역에 홀로 서성이니시(詩)/김영남 2016. 11. 30. 12:21
정선 아리랑 애정편 여량에 아직도 흐르고 있으리. 땅에 스며 싹이 되고 줄기 되어 꽃을 계속 피우리. 피우다가 이울면 누가 따서 다시 피우리. 그대여, 저기 고개 쳐드는 민박집 담쟁이 넝쿨을 보아라. 이 고을 저 고을 오르내린 사연 있고 그 밑 완두콩 속에 여기 강가에서 여문 우리들 몸이 있구나 경아, 해오라기야. 저녁 안개야! 저 오나두콩 속 그리운 텐트 위로하며 이제 난 동쪽으로 가야 하나, 서쪽으로 가야 하나? 뗏목처럼 도착한 열차는 날 태우지 않고 여량의 옛날만 싣고 떠나네. 여량역(餘糧驛) : 아우라지역(아우라지驛).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에 있는 정선선의 철도역이다. 개업 당시 역명은 소재지 지명인 북면 여랑리의 이름을 딴 여량역(餘糧驛)이었으나, 두 개의 물줄기가 이 곳에서 서로 어우러..
-
김영남 - 회진항에는 허름한 하늘이 있다시(詩)/김영남 2016. 8. 17. 22:11
내가 회진항의 허름한 다방을 좋아하는 건 잡아당기면 갈매기 우는소리가 나는 낡은 의자에 앉아 있으면 허름한 바다와 하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허름한 바다와 허름한 하늘이 존재하는 공간. 그곳에는 언제나 오징어가 이웃 순이의 팬티처럼 펄럭이는 빨랫줄이 있습니다. 그리고 검은 통치마를 입은 어머니가 바닷가로 걸어나가고 있고, 그 바닷가 하늘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완장을 차고 만화가게 앞으로 나타나는 게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회진항의 허름한 다방을 좋아하는 건 아직도 난로 위 주전자 뚜껑 소리 같은 사투리가 있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도 외상으로 남기는 목포 아저씨, 그 백구두 소리가 날아가는 하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회진항 :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 있는 어항이다. 회진항은 청정해역..
-
김영남 -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시(詩)/김영남 2016. 7. 24. 14:11
벚꽃 소리 없이 피어 몸이 몹시 시끄러운 이런 봄날에는 문 닫아걸고 아침도 안 먹고 누워있겠네 한 그리움이 더 큰 그리움을 낳게 되고... 그런 그리움을 누워서 낳아보고 앉아서 낳아보다가 마침내는 울어버리겠네 소식 끊어진 H을 생각하며 그러다가 오늘의 그리움을 어제의 그리움으로 바꾸어보고 어제의 그리움을 땅이 일어나도록 꺼내겠네 저 벚꽃처럼 아름답게 꺼낼 수 없다면 머리를 쥐어뜯어 꽃잎처럼 바람에 흩뿌리겠네 뿌리다가 창가로 보내겠네 꽃이 소리 없이 사라질까 봐 세상이 몹시 성가신 이런 봄날에는 냉장고라도 보듬고 난 그녀에게 편지를 쓰겠네 저 벚나무의 그리움으로 (그림 : 류은자 화백)
-
김영남 - 모든 고향에는 무지개가 뜬다시(詩)/김영남 2016. 4. 15. 00:51
버들강아지를 꺾어들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면 해안선, 보리밭, 대숲 이들을 보듬고 도는 하얀 시내가 보이고, 닭들이 꿩으로 날아가는 소리도 동구 밖까지 들린다. 그리고 나의 노래가 끝나는 부근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휘어진 가지를 이웃집 담장 너머로 드리운다. 이곳에서는 골목도 꼬부라지고, 그 꼬부라짐 속에서 아이들이 연달아 탄생한다. 탄생하다 그친 곳에서 개구멍과 헌 길이 시작되고, 새 길이 꿈틀꿈틀 올라가는 언덕 위에 무지개가 뜬다. 눈물이 많은 영혼 속에서만 뜨는 무지개. (그림 : 이인호 화백)
-
김영남 - 검정 고무줄에는시(詩)/김영남 2015. 8. 22. 10:10
내복의 검정 고무줄을 잡아 당겨본 사람이면 알 겁니다. 고무줄에는 고무줄 이상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이상의 무얼 끌어안은 손,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으로 무엇을 묶어본 사람이면 또 알겁니다 어머니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것을, 그래야 사람도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한 어머니일수록 그런 신축성을 오래오래 간직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고무줄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어머니란 리어카 바퀴처럼 둥근 모습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둥근 등을 굴려 우리들을 큰 세상으로 실어낸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지상 모든 고무줄을 비교하여 본 사람은 알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고무줄이 나의 어머니란 것을 (그림 : 김부자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