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병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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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나이테시(詩)/이병초 2018. 4. 20. 11:16
문짝도 정짓간도 다 짜부러져 차라리 폭삭 무너져버리면 보는 사람이 더 맘 편할 집 방이 궁금해 잠깐 들어갔는데 퀴퀴한 윗목에 나이테가 찍혔다 창문 쪽으로 갈수록 폭이 좁다 천장이 샜던 모양이다 속엣말 꺼낼 새도 없이 빗물이 줄줄줄 방바닥에 흥건했을 것이다 축축한 시간이 마르기도 전에 빗물은 또 들이쳤을 것이고, 줄줄줄 새는 천장을 버티며 집은 파리모기와 먼지와 빗물로 저렇게 반 잘린 나이테를 지어냈을 터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채 마르기도 전에 줄줄줄 샜을 내 몸 속 어딘가에도 저런 나이테가 찍혔는지 짜부라진 창문 너머에 핀 목련꽃 송이송이 눈이 시리다 (그림 : 전성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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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옥이시(詩)/이병초 2017. 12. 1. 15:01
밥 퍼낸 무쇠솥 바닥을 초승달 같은 놋달챙이로 닥닥 긁어서 주먹밥처럼 뭉쳐온 깜밥 놀장놀장 눌은 빛깔에 불티 뒤섞인 그 차지고 고소한 단맛을 조금씩 떼어먹다가 목 당그래질이 뭔지도 모르고 떼어먹다가 배 아프다고 꾀를 쓰면 가시내는 자취집 장광에 깔린 흙기와 조각을 구워와 내 배에 올려놓고 깜밥 묻은 손끝을 떨었다 형들은 여자 친구를 깜밥이라고 불렀다 너 깜밥 있냐고 대놓고 놀렸다 감춰 먹을수록 더 고소하고 차진 맛을 왜 여자 친구에게 빗대는지 잘 몰랐다 가늘어진 목선을 더 늘이빼며 저녁햇살은 그냥 또 지나간다 (그림 : 신창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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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윷놀이시(詩)/이병초 2016. 6. 1. 16:03
으런 야그허는디 워떤 시러베아덜놈이 흔 삼베바지 불알 삐지디끼 요렇게 삐드러짐서 걸레방구 뀌고 지랄이냐잉 가래침으로 마빡을 뚫어버릴 팅게 허고 자픈 말이 새벽 좆겉이 불퉁불퉁허드라도 쪼매 참어라잉 머라고라? 쑤꾸 들어간 것까장 삼만원이 걸린 윷판인디 시방 우아래 따지게 생겼어라? 옛날얘기 꺼내는 놈치고 제 집구석 부잣집 아닌 놈 웂고, 미나리 새순 겉은 첫사랑에, 니롱내롱 외입질에, 지까짓 거시 열일곱명허고 맞짱 깠다는 칫수 아닌 놈 웂다더니 워너니 아재도 그 칫수라닝게 단박에 다섯 모 걸은 따논 당상일 것잉만, 내 참 드러서 똥 쌀 자리가 웂당게 근디 니 말버르장머리가 영 재수빡머리 웂게 진행된다잉 어린 새끼들헌티 아즉 상복 입힐 계제가 못됭게 냅두것다만, 아줌씨덜이 키 작다고 삐쭉거려도 어느새 흘레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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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 봄밤시(詩)/이병초 2016. 4. 2. 00:21
공장에서 일 끝낸 형들, 누님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학산 뽕나무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창수 형이 느닷 없이 앞에다 대고 "야 이년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라!" 하고 고함을 질러댑니다. 깔깔대던 누님들의 웃음소리가 딱 그칩니다. 옥근이 형 민석이 형도 "내껏도 쪄도라, 내껏도 쪄도라" 킬킬대고 그러거나 말거나 누님들은 다시 깔깔대기 시작합니다. "야 이 호박씨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랑게!" 금방 쫓아갈 듯이 창수 형이 다시 목가래톳을 세우며 우두두두두 발걸음 빨라지는 입소리를 냅니다. 또동또동한 누님 하나가 홱 돌아서서 "니미 솥으다 쪄라, 니미 솥으다 쪄라" 이러고는 까르르 저만치 달아납니다. 초저녁 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반짝반짝 반짝이고만 있었습니다. (그림 : 백중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