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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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마흔 그 안온한시(詩)/서안나 2020. 8. 27. 08:12
방에서도 발바닥이 시리다 이제는. 무릎이 튀어나온 후줄근한 생을 걸치고 걸어가는 저 여자. 그녀 안으로 길이 음반처럼 휘어진다. 여자의 몸에서 흩어지는 가벼운 골목길들. 상한 길들이 그녀의 몸에서 조금씩 부패하고 있다. 숨이 막히고 토할 것 같아 물렁거리는 거리들. 이젠 한 손으로 거리의 기억들을 막아낼 순 없어. 그녀가 제 안의 작은 창문을 열면 그대와 그대의 마른 가슴과 안경과 흐트러진 풍경들과. 의자와 열린 옷장들과 검은 기미들. 허리가 맞는 옷이 없어요. 고지서와 펼쳐진 책과 밑줄을 긋다 잠드는 모든 저녁들과 그녀의 사진첩에서 울리던 황금빛 노래들은 이제 길 위에 사소한 한 계절로 저장되리라. 수많은 추억의 문을 열고 닫으며 경계를 넘나드는 저 여자. 그녀의 몸안에 저장된 추억의 경로들. 그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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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피아노시(詩)/서안나 2020. 3. 15. 09:12
피가 되는 것들은 아득합니다 나는 타악입니다 부딪혀서 아름답습니다 고통을 노래하는 방식입니다 아픈 쪽부터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건반을 누르면 소리는 소리를 끌고 대지의 끝으로 번져 갑니다 고통에는 모두 주인이 있습니다 소리의 표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건반을 누르면 피로 다녀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맨발로 물가를 걸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안녕 손을 흔들며 흘러가는 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봅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아름다운 얼굴이 쏟아집니다 나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어서 나는 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요 피아노는 저 많은 곡조를 다 껴안으려 다리만 남았습니다 바람 불면 나는 미와 레 사이에 있습니다 반음으로 찾아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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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소래포구에서시(詩)/서안나 2019. 10. 9. 13:00
갯벌에 묻어둔 첫사랑이 있어서일까 기어이 열차를 타고야 마는 까닭은 황금벌판을 지나 그리움으로 물든 가을 속을 달린다 가슴에 한가지씩 추억을 안은채 덜컹거리고들 있다 추억속으로 달리고 있다. 소래 가는 길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어쩌다 슬픈 사람도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에 내리면 그 많은 사람들에게 멀미를 하곤 희망을 생각하게 된다. 역사를 지나 골목을 들어서면 여자의 비밀한 그 곳보다 습한 개펄을 만나고 닻들이 가랭이 벌린 채 십자가처럼 누워 있다. 사내들은 강인한 턱으로 회를 씹어대고 어족류의 슬픈 전설이 바다에 퍼진다. 소래 구석구석에 도시의 어두움을 배설하는 술취한 사내들의 원시적인 뒷모습 갈매기들 몇마리 풍경으로 날고 있다. 누구든 슬픈 사람이 있거든 소래로 가라. 소래의 검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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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늦게 도착하는 사람, 상사화(相思花)시(詩)/서안나 2019. 10. 9. 12:51
꽃은 과거와 미래의 나의 사랑을 증명한다 내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 당신은 꽃이란 이름으로 당신에게 도착한다 없는 나는, 있는 당신을 향해 손을 내민다 당신에게 내미는 나는 이미 지워진 손 그러니까 나는 많이 낡았고 뿌리와 줄기의 초록은 숨을 참아왔던 거다 당신은 긴 목을 힘껏 뽑아 올려 제 얼굴을 찢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제가 불러놓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무게로 서서히 몰락하는 사람들이 천천히 밥을 먹는 저녁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은 다리가 없다 그대는 늦게 도착하는 사람 실컷 울고 나자 당신의 얼굴은 가벼워졌는가 나는 당신 쪽으로, 당신은 사라진 나를 향해 걸어온다 그렇게 스쳐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얼굴 이전의 얼굴 기다림 밖의 얼굴 당신과 나는, 잊혀진 우리의 1/2 꽃 진 자리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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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힘은 달콤하다시(詩)/서안나 2017. 10. 20. 09:29
여름날 꼬리뼈와 우족을 끓인다. 밤마다 뭉친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며 소처럼 신음소리를 내는 어머니. 골다공증 어머니를 위해 곰국을 끓인다. 꼬리뼈에서 힘센 노동의 기억이, 다리뼈에서 평생 자신의 몸을 끌고 다니던 다리의 힘이 천천히 풀려 나오고 있다. 곰탕이 눈물처럼 뜨겁게 끓어오른다. 한 가계의 기둥을 세워준 소의 든든한 다리가 조금씩 풀려나오고 있다. 소의 선한 눈망울을 닮은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커다란 과수원을 돌며 저녁까지 소처럼 일만 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맹목의 어머니, 그 선한 눈망울의 힘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눈물의 농도를 알기 위해선 하루 종일 뜨거운 가스 불 옆에서 나도 소 한 마리를 뒤집어 엎어야봐야 한다. 오랜 시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기름기처럼 떠오르는 눈물들을 한 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