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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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새 떼시(詩)/나희덕 2022. 3. 19. 23:27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계절 펄럭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그림 : 하종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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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겨울 아침시(詩)/나희덕 2020. 1. 24. 10:43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부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 허공 속의 길을 따라 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 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 새끼들이 푸르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가 꽉 찬다 큰 날개가 한 획 그으면 모화(模畵)하듯 날아오르는 작은 날개들, 그러나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곧 오리라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 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창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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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벗어놓은 스타킹시(詩)/나희덕 2019. 8. 6. 13:40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生)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러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그림 : 이영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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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산책은 길어지고시(詩)/나희덕 2018. 12. 10. 21:01
그의 왼손이 그녀의 오른손과 스치고 그녀의 그림자가 그의 그림자와 겹쳐질 때 그들은 서로에게 낯선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산책은 길어지고 둘 사이에 끼어든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란히 걷는 것은 아주 섬세한 행위랍니다 너무 앞서지도 너무 뒤서지도 않게 거리와 보폭을 조절해야 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걸음은 어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흰 실과 검은 실을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이 오면 그때야 서로를 알아보게 될까 산책은 길어지고 흩어진 발자국들은 말을 아끼고 어둠은 남은 발자국들을 다 지우지는 못하고 (그림 : 안모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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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종점 하나 전시(詩)/나희덕 2018. 9. 3. 13:59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 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그림 : 권대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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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비 오는 날에시(詩)/나희덕 2018. 4. 14. 13:32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 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그림 : 신운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