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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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음 - 사과와 트럭시(詩)/손순미 2021. 10. 11. 10:22
트럭 위에서 사과가 잠을 잔다 한 봉지 오천 원!을 외치던 팔리지 않는 사과가 남자를 대신해서 똥파리를 대신해서 늦가을의 오후를 곤히 잔다 모처럼 사과를 벗어난 사과는 트럭도 버리고 남자도 버리고 오로지 완벽한 잠이 되어 트럭을 잔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간다 지붕 밑의 잠보다 거리의 잠이 익숙한 사과가 부드럽고 따뜻한 잠을 잔다 오후가 늘어났다 다시 짧아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트럭은 어디든 갈 수 있는 바퀴를 가졌으면서 같은 곳에만 멈춰 있다 마트 사거리도 괜찮고 시장 앞 모퉁이도 나쁘지 않은데 조금만 움직여도 트럭과 사과와 남자의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사과는 딱 그만큼만 멈추어 있다 트럭도 남자도 딱 그만큼만 멈추어 있다 (그림 : 최성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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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음 - 밥 묵고 오끼예시(詩)/손순미 2021. 5. 17. 12:43
한적한 주택가에 슈퍼 하나가 있다 벚꽃나무 한 그 루 남편처럼 서 있고 주인은 온데간데없다 '밥 묵고 오끼 예' 신문지 한 장 찢어 붙여 놓고 그녀는 꽃놀이라도 간 것일까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그녀의 식사 는 길어지고 있다 '밥 묵고 오끼예' 봄날의 나물 같은 사투리가 그녀의 부재를 메우고 있다 나는 사이다 한 병 사러 왔다가 진 성슈퍼 아줌마 그너를 상상한다 파마머리일까, 뚱뚱할 까, 날씬할까, 테이블 위에 초록 콜라병에 벚꽃가지 하나 척, 꽂아 두고 사라진 그녀가 나는 궁금하다 '밥 묵고 오끼예' 어쩌면 미나리 같은, 냉이 같은, 씀바 귀 같은 대사 한마디 날리고 봄나들이를 선택한 그녀의 외출은 길어지고 있다 나는 봄날의 그림자처럼 길어지 고 있는 그녀의 식사를 오래 생각한다 (그림 :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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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거대한 밭시(詩)/손순미 2021. 3. 14. 14:15
깡마른 손 하나가 채소밭 하나를 밀고 간다 불구덩이 땡볕을 이고 오직 밭고랑을 밀고 간다 내리 딸자식만 일곱을 둔 거북 등짝 같은 할머니가 한여름 찢어대는 매미 소리를 이고 시퍼렇게 돋아나는 잡초를 밀고 간다 잡초들은 믿기지 않는 광기를 뿜어내며 할머니를 에워싼다 할머니는 호미 한 자루로 밭을 지키려 한다 상추와 호박과 고구마 속에서 열무와 고추와 가지 속에서 할머니는 진저리를 치며 호미질을 한다 진저리치는 만큼 잡초들은 자란다 전속력으로 자란다 상추와 호박과 고구마와 잡초와 열무와 고추와 잡초와 할머니가 서로가 서로를 저항하면서 자란다 이런 오살할! 욕이란 욕 다 얻어먹어 가며 비로소 여름은 완성되고 있다 (그림 : 이명복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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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벚꽃 피는 마을시(詩)/손순미 2020. 3. 23. 17:42
검고 깡마른 나무들의 몸에서 탁탁! 꽃이 터져나온다 고요한 마을에 벚꽃융단이 깔렸다 아이들은 가지를 분질러 꽃담배 피는 흉내를 내며 머리에다 벚꽃을 짓이겨 붙이고 어디라도 날아갈 것 같다 화르르 날리는 벚꽃 아직은 아까운 저 꽃, 소쿠리라도 받쳐 놓을까 벚꽃이 필 때는 나도 부자가 된 것 같아 박박 긁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몇 되씩 퍼주고 싶은 은화처럼 쌓이고 또 쌓이는 꽃들 가난만한 철학도 없었다 너도 한 되 나도 한 되 나는 아무래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벚꽃같이 순하게 웃을 것이다 맑고 순진한 가난이 더 아프다 (그림 : 성대영 화백) Toshiya Motomichi - We Walk In Silence Under Cherry Bloss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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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비의 검객시(詩)/손순미 2020. 3. 23. 17:38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저 거리에 저 건물에 활보한다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가난한 자의 지붕에 불행한 자의 가슴에 더욱 세차게 무수한 칼날을 꽂는 것이다 바람의 도포를 입은 비의 검객이 기승을 부린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가로등을 쓰러뜨리고 거친 호흡의 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 모두가 그 비를 피해 문단속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길한 행복을 조립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지짐이라도 부쳐먹자 고양이와 개들도 후미진 구석에서 가끔 밖을 내다볼 뿐이다 그래도 저 비를 뚫고 어디론가 바삐 가는 사람들은 비의 공포보다 두려운 삶의 협박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과다하게 행복을 부풀리며 그들은 빗속을 뚫고 간다 비가 그쳤다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쓰러진 자리에 눈물이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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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자판기시(詩)/손순미 2020. 3. 23. 17:36
저 화냥기 누구에게나 기꺼이 몸을 내주는 단돈 200원에 저리 뜨거워지네 눈물로 우려낸 거리의 여자 깔보면 안된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란 타당성이 있는 것 나를 잠깐 동안만 즐기는 당신 사랑했다는 말은 쓰레기통에 버려지네 일회용은 배반을 유행시키고 버려진 사랑은 비닐에 싸여 수거돼 가고, 재활용은 자존심이 상한다 불을 켜 다오 거리에 급하게 배달된 어둠을 달래야 한다 나에게는 아직도 사랑이 남아있다 (그림 : 이미경 화백) Paul Cardall - Still, Still,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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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아귀시(詩)/손순미 2019. 12. 14. 14:51
해변시장에 아귀 사러갔다 온 몸이 주둥아리인 아귀는 톱날 같은 이빨을 진실의 입처럼 벌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죄 지은 자의 손목을 확! 나꿔채기라도 할 것처럼 기세등등 커다랗게 벌린 입 속으로 햇살이 빨려들어간다 생선장수가 망나니처럼 칼을 들고 나와 사정없이 아귀 뱃속을 가르는데 조기, 새우, 가자미, 고등어, 오징어 등속이 나온다 바다의 것들을 모조리 잡아 삼킨 듯 뱃속에 어물전 하나 차려놓았다 먹어도 먹어도 한평생 허기에 빠져 산다는 아귀 귀신이 탐욕으로 생을 조롱했구나 죽음으로 탐욕을 고백했구나 아귀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낸 도마에 노을이 흥건한 저녁 아귀의 고해성사 한 접시 올려놓았다 한 마리 아귀찜을 먹는다 한 마리 아귀찜을 듣는다 (그림 : 강종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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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미 - 저녁의 시(詩)시(詩)/손순미 2019. 12. 14. 14:50
고양이 울음이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저녁보다 어두웠다 신발을 신은 울음은 모퉁이까지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골목은 먹물처럼 고요했다 어둠을 보관한 집들은 집의 입술인 창문을 열지 않았다 집의 근심은 하수구로 흘러 나왔다 수챗물이 눈물처럼 반짝였다 나뭇가지에 검은 색종이처럼 접혀 있던 새들의 깃털 터는 소리 낮게 들려왔다 밥물 잦는 소리 같았다 다시 길을 당겼다 담장의 자귀나무 연분홍 서로 몸을 부딪고 깊은 저녁을 껴안고 갔다 가로등이 흰 새알을 까는 동안 손수레를 끄는 노인이 남아있는 골목을 다 끌고 갔다 (그림 : 김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