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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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목련시(詩)/이대흠 2023. 3. 15. 10:33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세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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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시(詩)/이대흠 2020. 11. 6. 19:10
아지랑이 돋아나는 황토언덕에 그 사람 미소만 싱싱하게 살아나고 댓잎에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행여 그 사람 발소리인가 가슴 저리며 한 사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햇살만 내렸다 가는 간이역에서 쑥부쟁이 개망초 고무줄로 묶은 들꽃다발을 들고 기차는 가고 햇살 뜨거운데 뿌리없는 꽃처럼 시들어 가며 발만 동동 굴러 본 적이 있는가 구멍난 나뭇잎이 내 마음 같아 커다란 낙엽위에 그리움을 적으면 편지는 온통 그 사람의 이름뿐 몸보다 먼저 마음이 스산해서 지는 해만 한사코 바라본 적이 있는가 곱은 손으로 눈을 뭉쳐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가 몇 번을 부숴 버리고 그래도 다시 눈을 뭉쳐 흘러내린 눈물로 얼음처럼 단단한 눈사람을 만들며 한 사람을 오래도록 기다린 적이 있는가 (그림 : 김태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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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슬픔의 뒤축시(詩)/이대흠 2020. 5. 11. 17:17
슬픔은 구두 같습니다 어떤 슬픔은 뒤축이 떨어질 듯 오래되어서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참 오래 함께했던 슬픔입니다 너무 낡은 슬픔은 몸의 일부인 듯 붙어 있습니다 슬픔은 진즉 나를 버리려 했을 것이지만 나는 슬픔이 없는 게 두렵습니다 이미 있는 슬픔도 다하지 않았는데 새 슬픔을 장만합니다 새로운 슬픔은 나를 쓰라리게 합니다만 슬픔을 버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슬픔에 익숙해지려 합니다 남의 슬픔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지만 잠깐 빌릴 뿐입니다 (그림 : 문정화 화백) Shardad Rohani - Street S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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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다정에 감염되다시(詩)/이대흠 2020. 4. 24. 18:40
다정에게는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병아리 털처럼 순하고 병아리 눈동자처럼 동그랗습니다 다정은 손을 내밀고 다정을 담은 그릇에는 모서리가 없습니다 다정에는 가시가 많습니다만 너무 많은 가시에서는 가시를 느낄 수 없습니다 언뜻 본 다정은 안경닦이 같습니다 어떤 다정은 너무 커서 다정의 날카로운 발톱이 흙 언덕으로 보입니다 여력이 있다면 한 평의 땅을 사는 것보다는 다정을 구입하는 게 낫습니다 다정은 소모되지 않고 늘일 수 있으니까요 주의 사항은 있습니다 유통기한은 없습니다만 쉽게 흘릴 수 있습니다 다정을 과자 봉지에 넣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면 놀라울 것입니다 한 봉지의 다정을 담아 건네면서 달의 이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다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독은 아니고요 감염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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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물은 왜 너에게서 나에게로 흘러오나시(詩)/이대흠 2019. 5. 17. 08:58
그녀는 내게 손목을 주었을 뿐인데 내 손바닥에 강이 생겼다 어린 그녀의 손금 같은 강이 흐르고 강가의 돌멩이처럼 작아진 나는 굳어버린 귀로 물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손금의 강에 스며든 말은 얼마나 많은 모래 알갱이가 되었을까 희미하게 그녀가 모래알처럼 웃을 때 나는 모래알 같은 그녀의 웃음에 조금씩 부서져내렸다 그녀의 손목이 모래톱 같다고 느꼈던 그 순간에 내일은 모래가 되고 오지 않을 손목에 머리를 기대고 싶었던 나는 울며 졸이며 굳어가는 조청 같은 나의 생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여린 손목 하나를 강으로 놓아두었다 (그림 : 박지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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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시(詩)/이대흠 2019. 5. 17. 08:46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이마에서 북천의 맑은 물이 출렁거린다 그 무엇도 미워하는 법을 모르기에 당신은 사랑만 하고 아파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말은 향기로 시작되어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사라진다 누군가가 북천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 당신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거기 이미 출렁거리는 북천이 있다며 먼 하늘을 보듯이 당신은 물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는 순간 그는 당신의 눈둥자 속에 풍덩 빠진다 북천은 걸어서 가거나 헤엄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신의 눈동자를 거치면 바로 갈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걷거나 헤엄을 치다가 되돌아나온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사랑을 할 줄만 알아서 무엇이든 다 주고 자신마저 남기지 않는다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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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천원집시(詩)/이대흠 2019. 5. 17. 08:38
우리 동네 삼거리엔 구멍가게 하나 있는데요 가게나 점방이라는 간판도 없이 한 사십여 년 장사하는 집인데요 팔순인 월평 할머니가 하루에 과자나 두어 봉지 파는 곳인데요 물건 사러 온 손님이 가격표 보고 알아서 돈 주고 가고 외상값 같은 것도 알아서 머릿속에 적어 넣어야 하는 곳인데요 전에는 하루에 막걸리 두 말도 팔고 담배도 보루째 팔았대요 글 모르는 월평 할머니와 글 모르는 손님이 만나면 물건값이 눈대중으로 매겨지는 집이기도 하지요 물건값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쓸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는 월평 할머니의 경제학이 통하는 곳이기도 한데요 가격표 같은 것은 그저 참고 사항에 불과한 것이고요 낱돈 없는 날에는 구백원짜리가 천원짜리가 되고 천이백원짜리도 천원짜리가 되어서 그냥 천원집이라고 불리는 집인데요 한 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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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늙음에게시(詩)/이대흠 2019. 2. 7. 22:27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눈이 가려 봅니다 귀가 먼 것이 아니라 귀도 제 생각이 있어서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다 내 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 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되고 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 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눈이 보여준 것만 보고 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 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 눈으로 듣습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 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 발은 또 천리 밖을 다녀와 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림 : 박운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