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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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좋은 날시(詩)/정윤천 2019. 8. 5. 18:06
장에 간 엄마는 잘 안 오시는 것이다 우리 엄마 안 오시네 엄마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배추를 팔아 신발을 사 오실 엄마 엄마는 신발을 잊고 엄마는 빨랫비누만 소금 됫박이나 사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좋은 날이란 신발은 오지 않고 좋은 날만 따라왔던 것이다 언 발로 사위를 찍고 사라진 고라니의 겨울 산정도 신발처럼 저 너머에 솟아 있었던 것 이다. 고라니는 떠나가고 좋은 날은 혼자 남아 기다렸던 것이다 고라니도 신발을 깜빡 했다고 들켜주었던 것이다 엄마처럼 좋은 날은 어디선가 제 신발을 찾아 신고 오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림 : 이원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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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지명(地名)시(詩)/정윤천 2017. 8. 11. 21:41
스무살 무렵에 나는 해남이라는 지명을 퍽이나 동경했었다 거기, 바다가 시작되는 어느 산기슭에 땅 끝이 있다고 전해져 왔다 어쩌면 내 스무 살은, 시작과 끝이 한 뒷골목에서 함께 건들거렸던 누구라도 주워서 그을 수도 있던 깨진 병 같은 시절이었다 마흔 살 무렵이 가까워 오자, 나는 혼자서 여수에 가고 싶었다 내리막 길이 끝나 가는 허름한 점방집 유리문 같은 것에 대고 곧장 여수를 향해 가는 길을 묻고 싶었다 쑥부쟁이 닮은 주인집 여자가, 왔던 길 쪽을 향해 손사래를 치켜들고 한참이나 도라 도라 도라, 도리질을 쳐주어도 어쩌면 그 길을 되짚어 가지 않을지 몰랐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의 방식으로 그 지명들을 그것들이 간직하고 있었을 파란만장의 내재율을 가만히 어루만져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림 : 김명효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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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객지 밥시(詩)/정윤천 2017. 7. 17. 09:56
객지에 나와 견디는 이들에게 식당에 가는 일은 때론 고역이다 어쩔땐 정말 구멍 난 냄비 바닥 때우러 가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끼니 때우러 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날따라 하필 옆자리의 아이들이 야단법석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다가 곁에 있는 밥상 위로 올라서기까지 한다 한동안 참아 내다가 냅다 고함을 쳐주고 만다 어린 녀석 하나가 울음보를 터뜨린다 아이들을 방기해 두었던 부모들이 인상을 구기는 게 보인다 자식이 아무리 귀하다고 저렇게 키워도 되는 거냐고 아무나 들으라는 듯이 한 소리 부쳐준다 ‘엉길까 말까’ 하는 남자 쪽의 기미가 보인다 “객지 밥 우겨넣는 일도 갈수록 심란헌디,“ 어쩌고 목청을 한 옥타브쯤 올려준다 남자의 꼬랑지 내리는 소리가 방석귀를 스친다 여자는 벌써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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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목포처럼 있었고시(詩)/정윤천 2017. 7. 17. 09:49
정오의 희망가요나 흘려주는 라디오처럼 있었고 희망가요의 옆구리에서 새 나오는 가사들처럼은 있었고 사랑해선 안 될 것들을 사랑한 게 죄이냐며 있었고 진정 난 몰랐다고 수작을 떨기도 하는 허풍선이만큼으로도 있다가 북항은 막배를 보내 놓고 돌아서서 찔끔거려 보는 눈물같이는 있다가 어제처럼 둘러앉아서 한잔씩 걸쳐 보면서 있었다가 왜정 때 버리고 간 동양척식 사옥의 지붕처럼 있기도 하다가 그러다가 한 번씩은 애비 없는 호로자식들 같은 표정 부리다가 흉터에 찬 새살처럼 뚜렷이는 있었고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생긴 궁뎅이 밑의 곰발이같이 있기도 했으면서, 이렇게 말하면 역전에서 대반동 포차들 불빛 아래까지를 멋대로 나와바리 삼은 목포의 가죽장갑들이 너는 좀 터져야겠다고 다구리를 놓으려 들지 몰라도 건달 영화나 찍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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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가을바다에 오지마라시(詩)/정윤천 2015. 6. 11. 11:54
가슴에 재가 남은 사람은 초가을 바다에 오지마라 가을바다에서는 흙피리 소리가 난다 댓이파리 쓸리는 걸음 무늬를 낮아져 가는 물 위에 새겨 두고 여름의 끝바람 몇 떨기가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어져 갈 때 쓰라린 목메임을 아직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초가을 바다엘랑 오지마라 어디선가 저렇게 소리 구멍을 빠져 나와 제멋대로 끼룩이는 가을바다의 피리소리 가까이 귀를 적시면 낮아질수록 푸르러지며 주저앉을 듯 한사코 일어서던...... 깊은 음절의 계명階名들 버릴 것들을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사람은 초가을의 바다 근처에 와서 얼씬거리지 마라 보낼 것들을 다 떠나 보낸 자리에서 가을바다는 혼자서 문을 연다. (그림 : 이유정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