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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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내 마음의 황혼시(詩)/정윤천 2015. 6. 7. 21:18
동사(動司)보다는 명사(名司)가 더 마음에 끌리는 시절이 오기는 하는 거겠지 이때쯤. 나는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의 초입어름에서 하필이면 민박집이라는 단어 하나가 불현듯이 내 마음에 차올라 아예 그 집의 주인 행색으로 퍼질러 앉아 버려도 되겠다는 생각을 까짓것 실행에 옮겨 버려도 괜찮을 수도 있는 거겠지 '바다네 민박집' 때마침 그 집 앞에, 백살도 더 먹은 늙은 팽나무라도 한 그루 마춤하게 자리 잡고 서 계시거든 어느 심심한 저녁나절이면, 저 풍상의 세월, 편지 글씨처럼 아로새긴 잎잎들이 후둑여 주는 푸른 입술파람 소리에 空으로 귀를 씻어도 좋은 하루가 저물어 갈 수도 있는 거겠지 손님들이 다 돌아간 헌 방안을 치워 내다가 거기 지난날 어디에선가 내가 흘리고 온 허물도 몇 올 함께 쓸어 담아 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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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들쑥 향내는 바람에 날리고시(詩)/정윤천 2015. 5. 27. 21:00
누야는 막내를 업고 나는 새참 보퉁이 마을은 벌써 등 너머서 끝이나 산입(山入)의 탱자나무 길 고적한 울타리가엔 누군가 흘려놓고간 상여꽃 ...... 하얀 ...... 상여꽃......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날리고 미영꽃 하얀 미영밭 속에 할매는 영락없는 한 송이 미영꽃 엄니는 흙 묻은 젖무덤 열어 엉거주춤 뒤태 돌아앉으면 우리 식구 그 산밭머리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날리고 한 삼년 미영농사 벌어 이불 세 벌 짓고 나면 누야는 삼십리(三十里)길 시집가는 길 꽃처럼 그 길 위에 흘려놓고 간 손수건...... 하얀 ...... 손수건......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날리고 (그림 : 구병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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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우체국 앞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시(詩)/정윤천 2014. 8. 5. 00:17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억을 가진 사람과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구라도 한 사람을 기다려본 기억이 없는 사람의 인생의 무늬에는 어딘지 차이가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생이 바닥으로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 와서 깔리고, 모든 생의 그 그늘들은 다른 방식으로 스러지기도 할 것 같았다.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등에 대고서라도, 이제라도 '그'를 한번 기다리며 서 있어보라고, 가만히 말을 건네주고 싶었던 가을날이 있었다. (그림 : 서정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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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경첩시(詩)/정윤천 2014. 8. 5. 00:10
너를 열고 싶은 곳에서 너에게로 닿고 싶을 때 아무에게도 내키지 않은 저 은밀한 해제의 지점에서 쇠 나비 한 마리가 방금 날개를 일으켰다는 일이다 그의 차가운 두 닢이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듯이 한번은 펼쳐 주어야만,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있다는데 경첩은 지금 자신의 생각을 마쳤다는 것이다 너를 한번 열어 너에게로 간다는 사실은 어딘지, 너 이전의 지점같기도 한 잘 보이지 않은 곳에서 엉버틴 날개 두 짝의 쇠 나비 한 마리가 활짝 펼쳐 주었다는 일이다. 경첩 : 창이나 문을 달 때 쓰는 철제 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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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저녁의 시시(詩)/정윤천 2014. 8. 2. 21:33
저녁이 오면 사람들의 마을에 아름다움의 빛깔이 든다 저녁이 온다고 마을이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랴 한낮의 온갖 수고와 비린 수성(獸性)들도 잠시 내려 두고 욕망의 시침질로 단단히 기웠던 가죽지갑도 주머니 속에 찔러 두고 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들로 사람들이 돌아오기도 하는 때 돌아와서 저마다의 창에 하나 둘의 등불을 내걸기도 하는 때 그러면 거기, 일순처럼 사람들의 마을로는 아름다움의 물감이 번지기도 한다 더러는 제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으로 방심과도 같은 마음의 등을 기대기도 하면 머리 위의 하늘에선 이 지상의 계급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어린 별들의 수런거림이 일렁이기도 하는 때 저녁이 오면 저녁이 오면 어디선가, 낮은 처마의 이마께를 어루만지며 스스럼 없는 바람의 숨결 같은 것이 시간의 긴한 어깨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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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지나간 자리시(詩)/정윤천 2014. 8. 2. 21:30
1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 모든 것들은 머물다 간다 비 지나가고 나면 비 지나간 자리는 젖고 비 지나간 자리는 볕만이 와서 말리고 간다 이럴 때는, 볕이 지나가고 볕이 머물다 간 것이 된다 사람의 흉중으로도 때론 비 지나가고 그 자리 위로, 볕이 머물다 가기도 한다. 2 비 지나가고, 볕이 와서 머물다 갔더라도 마음이 지닌 것 중에 못 말리는 것이 하나 있다 비 지나가고, 제아무리 볕이 와서 머물다 갔더라도 먼 곳을 향해 젖어 있는 눈시울 같은 기억이 있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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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너라고 쓴다시(詩)/정윤천 2014. 8. 2. 21:27
솜꽃인 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 아득했을 거리를 너라고 부른다 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저처럼의 하늘을 너라고 여긴다 그날부턴 당신의 등뒤로 바라보이던 한참의 배후를 너라고 느낀다 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고야 만 이 아침의 먼 길을 너라고 한다 직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까지 왔다가, 그 앞에서 돌아선 어느 하룻날의 사연을 너라고 믿는다 생이 한 번쯤은 더 이상 직진할 수 없는 모퉁이를 도는 동안 네가 있는 시간 속으로만 내가 있어도 되는 마음의 이런 순간을 너라고 이름 붙여주고 나면 불현듯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라곤 사라져버려선 사방에서 사방으로 눈이라도 멀 것만 같은 이 저녁의 황홀을 너라고 쓰기로 한다 (그림 : 노재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