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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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쑥부쟁이의 노래시(詩)/서지월 2018. 9. 19. 13:27
우리가 먼 길 가는 바람 앞에서 늘 배웅하는 자세로 흔들린다면 흐르는 시냇물도 제 갈 길 따라 가겠지만 가서는 오지 않는 이름들이 가슴에 남아 밤이면 무수한 별들의 재잘거림으로 높이 떠서 이마 위에서 빛날 일 아니겠는가 심지어 때아닌 먹구름장 겹겹이 몰려와 천둥과 번개를 일으켜 위협할 때도 땅에 뿌리박고 사는 죄 하나로 흠뻑 비맞고 놀라 번뇌의 세상 굳굳하게 견뎌낸다지만 표석처럼 지키고 선 이 땅의 이름은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생각해 보면 먼 길 재촉하는 구름이나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 귓전에 사무쳐 오지만 스스로의 무덤을 만들며 스스로의 잠언을 풀어내는 몸짓 하나로 남아서 모두가 떠나도 떠나지 않고 푸른 손 휘저으며 여기 섰노라 (그림 : 장용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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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당산(堂山)나무 잎새들이 푸르른 것은시(詩)/서지월 2016. 2. 4. 17:51
堂山나무 잎새들이 푸르른 것은 내 아버지적 소달구지 끌고 비껴 지나던 소발자국 소리와 물방앗간으로 향(向)하던 어머니 머리 위 떡시루 항아리 따라붙은 하늘이 되살아나 오늘처럼 堂山나무 잎새들이 푸르른 것은 내 이마가 아버지 닮은 거와 내 웃어보이는 상(像)이 어머니의 웃음 쏙 빼닮은 거와 堂山나무의 잎새들이 새로이 푸르른 것은 저기 저 골목을 뛰어들어오는 다섯 살배기 아들냄이가 아부지 아부지 하며 부르는 것과 내 손을 꼭 닮았다는 거와 堂山나무 잎새 푸르른 길을 지나오면서 내 다섯 살 적에도 저러하였으리라는 생각과 맞물려서 오늘은 堂山나무 잎새가 마냥 푸르러 보이는 것이다 (그림 : 김병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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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앞산도 흰눈 쓰고시(詩)/서지월 2016. 2. 3. 12:29
오늘은 흰눈 쓴 앞산의 나무들이 걸어나와 흰 배때아리 드러낸 까치 몇 마리 날리고 있다 꺼칠한 흰 수염의 아버지는 땅속 깊이 잠드신지 오래, 마당을 밟고 뜨락을 오르시던 어머니마저 욋골의 흰눈 덮힌 잔디 아래 누우셔서 말없으신데 왠지 오늘은 흰눈 쓴 앞산의 나무들이 줄지어 걸어나와 청명한 하늘 드리우고 있다 저어기 누가 소달구지에 쌀가마 싣고 방앗간으로 향하는 느린 길이 보인다 아아 어린것들 방안에는 젖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것들 분홍손톱달이 이쁘고 부엌에는 밥 짓는 아내의 옆모습이 아름답다 방문을 열고 나와 대청마루 끝 이제는 흰 수염의 아버지 대신 뒷짐지고 바라보는 저기 저 골짜기 앞산도 흰눈 쓰고 나를 오라 오라 하는 듯 눈뭉치 툭툭 떨어뜨리며 푸른 소나무 등걸엔 흰구름 한 송이 걸렸네 앞산 : 비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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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팔조령에서의 별보기시(詩)/서지월 2016. 2. 3. 12:20
우리는 팔조령에 별을 보러 갔지요.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별을 보러 갔지요. 두 발 동동 구르며 쳐다보는 밤하늘 어둠 속에 소풍 나온 바람과 함께 별을 보러 갔지요. 모여서 사는 것이 더 아름다운 거라고 별들은 우릴 내려다보며 노랠 불렀지요.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불빛과 밤 이슥해도 꺼질 줄 모르는 저들만의 눈짓이 우리가 모르는 골짜기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닭 울음소리 담을 뭉개는 새벽녘이면 또 어디로 쉬임없이 흘러갈지 몰라도 무시로 저무는 별을 봤지요. 어깨 겯은 나무들이 둥둥 떠오를 즈음 밤은 먼발치의 길을 덮고 언덕을 덮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듯 우리는 얼굴 하나로 꼿꼿이 서서 별을 봤지요. 팔조령(八助嶺)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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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 빈 소쿠리의 노래시(詩)/서지월 2016. 2. 3. 12:15
너는 지금 내 잠의 어느 변두리에서 쉬고 있는가. 도라지 씀바귀 참비름 취나물 그 목숨들의 수북한 잔치 끝낸 지 오래 젊은 날 어머니 밭둑에서 뛰놀던 바람이여 휘몰아쳐 간 눈발들의 돌아선 뒷모습 앞에 오지 않는 물살을 데불고 석양(夕陽)은 저만치 비켜 平床 위에 앉아 있네. 굳어진 돌처럼 돌의 침묵처럼 뜨락의 채송화며 맨드라미며 봉숭아며 물달개비며 꽃등(燈) 밝힌 채 저물고 있네. 내 잠의 숭숭한 모퉁이에 떠 가는 구름 행렬 훔쳐 볼 뿐 꿈 속에서 보았던 흰 날개죽지의 새 한 마리 그 행방을 찾다가 길을 잃어버렸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시간의 맥박소리 들으며 나는 홀로 빈집 지키는 아이가 되어 있네. (그림 : 최금년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