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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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용천사 꽃무릇시(詩)/홍해리 2021. 4. 6. 11:55
내 사랑은 용천사로 꽃 구경가고 혼자 남아 막걸리나 마시고 있자니 발그림자도 않던 꽃 그림자가 해질 임시 언뜻 술잔에 와 그냥 안긴다 오다가 길가에서 깨 터는 향기도 담았는지 열예닐곱 깔깔대는 소리가 빨갛게 비친다 한평생 가는 길이 좀 외로우면 어떠랴마는 절마당 쓸고 있는 풍경 소리 따라 금싸라기 햇볕이 이리 알알 지천이니 잎이 없어도 꽃은 잘 피어 하늘 밝히고 지고 나면 이파리만 퍼렇게 겨울을 나는 꽃무릇 구경이나 가고픈 가을날 한때. (그림 : 전홍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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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호박시(詩)/홍해리 2021. 4. 6. 11:53
한 자리에 앉아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벋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개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이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시다. (그림 : 배용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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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빨랫줄시(詩)/홍해리 2021. 4. 6. 11:48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나는 팽팽하게 걸린 지구의 마지막 힘줄, 맑은 날이면 햇볕에 반한 하늘도 내려와 옷을 벗는다 내게 매달려 펄럭이는 푸른 희망 물에 바래고 햇빛에 바랜 깨끗한 영혼들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늦게 돌아와 빨랫말미를 잡은 처녀들 신산한 속속곳들이 내게 와 매달린다 상처가 지워지듯 털어내는 집착이라는 병 가벼워질수록 빛나는 웃음소리로 바스락바스락 마르는 양말짝의 길 젖은 무게만큼 나는 황홀했다 그런 날 밤이면 내 몸도 출렁출렁 바람에 흔들린다 유성이 내려와 품에 안기고 칠흑의 밤은 깊어간다 바람도 잠든 한밤 눈을 뜨는 그리움처럼 마당에 빨랫줄 하나 하늘을 가르고 있어야 사람 사는 집이다. (그림 : 이수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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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처음처럼시(詩)/홍해리 2021. 1. 9. 13:23
'처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겨운가요 '첫'자만 들어도 설레지 않는지요 첫 만남도 그렇고 첫 키스는 또 어때요 사랑도 첫사랑이지요 첫날밤, 첫새벽, 첫정, 첫잔 나는 너에게 첫 남자 너는 나에게 첫 여자이고 싶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따르는 한잔의 술 첫 키스의 아련한 감촉처럼이나 첫날밤의 추억처럼 그렇게 잔을 들어 입술에 대는 첫잔 첫정이 트이던 시절의 상큼함만큼이나 나도 처음처럼 너도 처음처럼 언제나 처음처럼이라면 물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긴 여로 처음처럼 그렇게 살다 갈 수 있다면.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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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구두끈시(詩)/홍해리 2018. 10. 25. 11:56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걸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 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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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개망초꽃 추억시(詩)/홍해리 2018. 9. 4. 19:29
막걸리 한잔에 가슴 따숩던 어둡고 춥던 육십년대 술 마셔 주고 안주 비우는 일로 밥벌이하던 적이 있었지 서문동 골목길의 막걸리집 인심 좋고 몸피 푸짐한 뚱띵이 주모 만나다 보면 정이 든다고 자그맣고 음전하던 심한 사투리 경상도 계집애 좋아한다 말은 못하고 좋아하는 꽃이 뭐냐고 묻던 그냥 그냥 말만 해 달라더니 금빛 목걸이를 달아주고 달아난 얼굴이 하얗던 계집애 가버린 반생이 뜬세상 뜬정이라고 아무데서나 구름처럼 피어나는 서럽고 치사스런 정분이 집 나간 며느리 대신 손자들 달걀 프라이나 부치고 있는가 지상에 뿌려진 개망초 꽃구름 시월 들판에도 푸르게 피어나네 (그림 : 한부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