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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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팔베개시(詩)/홍해리 2015. 8. 10. 20:51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 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 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생(生)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그림 : 황영성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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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제비붓꽃시(詩)/홍해리 2015. 7. 1. 21:11
밥도둑 하나 잡아 오면 아내의 입맛이 돌아와 꽃이 필까 단무지도 없는 단순 밥상머리 애멀무지로 떠넣는 맛없는 마른밥 보릿고개보다 넘기기 힘드네 한평생 애바르지 못하고 발밭게 살지 못한 아내여, 아내여 아무래도 못난 사내인 내가 밥맛 입맛 다 떨어진 당신 제삿날로 밥숫갈 갈 수 있는 밥도둑 퍼뜩 모셔와야겠네 제비붓꽃 같던 아내 양볼제비하는 모습 볼 수 있다면. 애멀무지로 (부사) : 에멀무지로, 에멜무지로 1. 물건을 단단히 묶지않은채 2. 헛일하는 셈치고 시험삼아를 뜻하는 북한사투리 양볼제비 : 양 볼에 음식을 가득 넣어 욕심껏 탐내어 먹는 일. (그림 : 김기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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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비밀시(詩)/홍해리 2015. 2. 24. 16:11
그 여자 귀에 들어가면 세상이 다 아는 건 시간 문제다 조심하라 네 입을 조심하라 그녀의 입은 가볍고 싸다 무겁고 비싼 네 입도 별수없지만 혼자 알고 있기엔 아깝다고 입이 근지럽다고 허투루 발설 마라 말 끝에 말이 난다 네 말 한 마리가 만의 말을 끌고 날아간다 말이란 다산성이라 새끼를 많이 낳는다 그 여자 귀엔 천 마리 파발마가 달리고 있다 말은 발이 없어 빨리 달린다, 아니, 난다 그러니 남의 말은 함부로덤부로 타지 마라 말발굽에 밟히면 그냥 가는 수 있다 그 여자 귓속에는 세상의 귀가 다 들어 있다 그 여자 귀는 천 개의 나발이다 그녀는 늘 나발을 불며 날아다닌다 한번, 그녀의 귀에 들어가 보라 새끼 낳은 늙은 암퇘지 걸근거리듯 그녀는 비밀(肥蜜)을 먹고 비밀(秘密)을 까는 촉새다 '이건 너와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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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속리산시(詩)/홍해리 2014. 10. 17. 19:16
천년 수림의 몸부림도 이파리 가락의 여운도 몸살이 날 일이다 몸뚱어리 하나 못 다스리는 한으로 시퍼러이 멍들도록 가슴 비비는 시장기처럼 오는 가슴앓이를 한잔술로 풀며 꽃 태우는 산덩어리 눈 감으면 꿈이야 어디론 못 오랴 그 길목에 닐니리 불어 육자배기나 뽑아 볼까 이승의 사랑은 은싸라기 달빛 사월이나 초파일 영등놀이 바람소리나 내고 가는 세월은 다섯 자 육신을 묻을 그 꽃밭으로 물오른 초여름 나뭇가지 사이 그리 고운 정도 없이 달은 밝아 복사꽃 살구꽃 억겁으로 지는 밤에 알몸으로 우는 내 풀잎의 이슬방울 꽃 한 송이 다 못 피우는 세월이사 천년 수림의 그늘을 흔들고 있다. (그림 : 김성실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