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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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찻잔을 앞에 두고시(詩)/이건청 2020. 9. 6. 10:37
푸르름이 되고 싶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눕히며 편안히 아주 편안히 흔들리는 푸르름이 되고 싶다. 푸르르 푸르르 멧새가 날아와 깃을 드리울 푸르름이 되고 싶다. 잔잔히 웃는 그대여 우리들의 산에 대하여 우리들의 산을 감싸고 흐르는 강에 대하여 출렁이며 하류로 흐르는 강에 대하여 낮은 소리로 속삭이는 푸르름에 섞이고 싶다. 편안히, 아주 편안히 찻잔을 잡고 싶다. 이마와 이마를 마주하고 싶다. 우리들이 쌓아올린 산에 대하여 안개에 대하여, 비에 대하여 말하며 의자에 앉고 싶다. 찻잔을 앞에 두고 낮은 소리로, 낮은 소리로.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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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 삽시(詩)/이건청 2017. 7. 5. 14:08
막장에 가고 싶다. 거기가서 내 삽을 찾고 싶다. 탄가루 묻은 내 도시락통, 땀에 쩔은 수건과 검은 작업복, 거기 그냥 두고 온 내 도구들을, 수직갱으로 하강해 가던 검은 나를 찾고 싶다. 탄더미 속에 반짝이던 두 눈, 하이얗게 빛나던 치아, 쏴아쏴아 불어오던 원시 밀림의 바람소리, 거대한 두 발 짐승의 발자국 소리, 나는 막장에 가고 싶다. 내 삽과 곡괭이, 그리운 내 도시락, 땀에 쩔은 작업복, 오늘 나는 막장에 가고 싶다. 거기가서 내 삽을 찾고 싶다. (그림 : 박진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