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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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 강은 전생을 기억할까시(詩)/이홍섭 2023. 6. 1. 13:39
어디 마음 둘 데 없을 때 쪼그려 앉아 흘러가는 강물이나 바라보는 것은 강이 자신의 전생을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마음 둘 데 없다는 것은 지금 내가 현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두 발로 서 가는 사람에게나 외발로도 서 있는 나무 밑에 가 울고 있겠지 쪼그려 앉아 얼굴에 물때가 끼일 때까지 앉아 있는 것은 강의 전생에 위로 받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심하게 흘러가는 저 강물에 위로받을 수 있을까 큰 홍수가 나면 알지 강물은 자신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 달려가고 길을 막으면 그 자리에서 한 생을 걸고 범람한다는 것을, 강이 휘어 흐르는 것은 다 전생이 아프기 때문일 거야 어디 마음 둘 데 없더라도 해질 무렵에는 강가에 나가지마, 강의 전생이 아니 너의 전생이 붉은 노을 속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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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 진또배기시(詩)/이홍섭 2020. 3. 29. 17:24
젊은 날, 해변을 떠돌다 진또배기를 만나면 반가웠다 푸른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녔지만 사람이 깎아 만든 새가 그토록 정다웠던 이유를 몰랐다, 새를 쳐다보며 아득히 외로웠던 이유를 몰랐다 이제는 외로움의 경계를 아는 나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나와 당신의 경계를, 발아래 사무치는 파도의 외로움을 아는 나이 하늘에는 새가 날고 사람이 깎아 만든 새는 영원히 고독을 나느니 오늘은 서쪽 구름이 새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진또배기 : 강릉에서 솟대를 지칭하는 말 (그림 : 이민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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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 두 갈래 길시(詩)/이홍섭 2019. 2. 7. 21:39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은 안목 가는 길 다른 한 길은 송정 가는 길 한 길은 외로움을 비수(匕首)처럼 견디는 길 다른 한 길은 그대에게로 가는 먼 길 그 길들 바다로 흘러가기에 이것이 삶인가 했습니다 찬물에 밥 말아 먹고 철썩철썩 달려가곤 했습니다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로 가면 그대가 아프고 다른 한 길로 가면 내 마음이 서러울까봐 갈림길 위에 서서 헤매인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길 아닌 길 없듯이 외로움 아닌 길 어디 있을까요 사랑 아닌 길 어디 있을까요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그림 : 허필석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