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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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완창시(詩)/마경덕 2022. 4. 26. 18:04
산굽이를 돌아온 계곡물 갈래갈래 물길이 만나 철철철 음역을 높인다 서로서로 등 떠밀며 웅덩이에 주저앉은 물의 엉덩이를 끌고 내려간다 저 아래 절창이 있다 물의 비명이 자욱한 해안폭포가 있다 번지점프를 앞두고 밀어붙이는 투명한 채찍들, 등짝을 후리는 소리에 물의 걸음이 빨라졌다 개울에서 꼼질거리던 물의 애벌레들 하얗게 질려 폭포 끝에서 넘어지고 처박히더니, 일제히 우화를 하고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굽이굽이 긴 노래 완창이다 피를 토하며 득음을 한 명창도 있었다 (그림 : 정인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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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만가(輓歌)시(詩)/마경덕 2022. 2. 19. 15:49
그 소리는, 이슥도록 갯가를 떠돌다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산동네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와 밤바다를 철썩이며 선잠을 흔들던 청승맞은 그 기운은 언젠가 밤길에서 만난 혼불처럼 어둠의 틈새로 사라지고 어느 순간 소리에 꼬리가 돋아 그 꼬리를 붙잡고 가늘게 명줄을 이어 갔다 주거니 받거니 물보라를 일으키는 애끊는 리듬은, 풍랑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종오 엄마가 다리 뻗고 바닥을 치며 울던 젖은 곡조여서 사무치고 사무치는 것이었다 누구일까 폐병쟁이 황 씨, 노름쟁이 곰보 천 씨, 지게꾼 학출이 아버지도 그 길을 따라갔는데 또 누구일까 날이 밝으면 집 앞을 지나가던 꽃상여와 꽃잎처럼 붉은 울음과 노잣돈 없어 못 간다는 요령 소리가 귓전에 매달려 어린것이, 세상을 다 살았다는 얼굴로 눈물을 찔찔 흘리던 밤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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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갈꽃비시(詩)/마경덕 2021. 6. 14. 15:37
바닥에 쓸리는 마른 갈꽃들, 부드러운 허공을 쓰다듬으며 스치는 바람이나 붙잡고 살려했더니 꿈은 가장 먼 곳에 있었다 평생 얼굴을 비비며 살아갈 곳은 딱딱한 바닥이었다 어느 촌로의 손에 뽑히는 순간, 수숫대가 모가지를 버리듯 불길한 예감에 떨었을 갈대의 꽃 박제된 시간들이 오색 끈으로 단단히 묶였다 마당 귀퉁이에서 수수비가 늙어가듯 마루와 방문턱을 넘나들며 시나브로 제 목숨을 허물었다 입술 다문 꽃술이 바스러질까 묽은 소금물에 끓고 그늘에 피를 말린 저 꽃을 낙화라고 불러볼까 꽃 때를 기다린 갈대밭이 서둘러 꽃을 버린 것은 오래전의 일, 습지에 바람이 다녀가는 것도 생의 각질을 털어내는 일이었다 허공을 쓸던 버릇으로 머리부터 사라지는 갈꽃비, 그에게 바닥이란 하늘과 같은 말이다 벽에 거꾸로 걸린 그의 생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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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슬픈 저녁시(詩)/마경덕 2020. 12. 8. 11:00
저녁에게는 누가 저녁밥을 지어주나 찬밥 한술 뜨고 담배 한 대 태우고 한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와글와글 몰려드는 저녁들 야근을 마친 새벽 어디에 자리를 펴고 누울까 저녁에게 눈부신 아침이 저녁이라면, 한 올의 빛과 소음도 뼛속에 스미지 않도록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잠을 눕히고 귀를 틀어막는, 시끄러운 대낮을 저녁이라 부르는 슬픈 족속들 저 불안한 잠에게 누가 이불을 덮어주나 번번이 코피를 쏟는 저녁에게 굶지 말라고, 밤일에 몸이 축난다고, 누가 차디찬 저녁의 등을 만져주나 다시 떠오를 수 있을까 아무데나 등 기대면 깊은 어둠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피가 마르는 저녁들 오늘 밤 졸지 말자고 빈속에 커피를 석 잔이나 마시고 박카스도 마시고 검은 작업복을 걸치고, 우르르 일하러 나오는 저녁들… (그림 : 박성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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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거꾸로 콩나물시(詩)/마경덕 2020. 8. 10. 18:15
전주콩나물국밥집 다른 집보다 천 원이 비싸다하니 주인아주머니 벽에 붙은 광고지를 가리킨다 콩싹이 3cm쯤 자랐을 때 뒤집어 키운 콩나물이란다 키가 3cm라면 아직 세상물정도 모르는 어린것들인데 피가 거꾸로 돌도록 물구나무를 세우다니, 재배장치로 발명특허를 받은 콩나물은 잔뿌리가 없다. 그것은 아직 첫발도 떼지 못했다는 것 거꾸로 자라 저항력이 생겨서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데, 그 저항력을 뒤집어 보면 악착스럽고 모질어졌다는 말 살기 위해 오기를 부렸다는 말 입도 떨어지지 않은 것들, 얼마나 독심을 품었으면 뿌리조차 썩지 않으랴 콩켸팥켸 뒤섞여 머리만 키운 콩나물 아삭아삭 씹힌다 피가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 (그림 : 허영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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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뒤끝시(詩)/마경덕 2020. 4. 22. 13:19
버스 뒷좌석에 앉았더니 내내 덜컹거렸다 버스는 뒷자리에 속마음을 숨겨두었다 그가 속내를 꺼냈을 때도 나는 덜컹거렸다 뒤와 끝은 같은 말이었다 천변(川邊)이 휘청거렸다 나무의 변심(變心)을 보고 있었다 이별을 작심한 그날부터 꽃은 늙어 북쪽 하늘이 덜컹거렸다 코푼 휴지를 내던지듯 목련은 꽃을 던져버리고 남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발밑에 널린 파지를 밟으며 걸었다 자줏빛 눈물이 신발에 묻어왔다 길가 벚나무가 검은 버찌를 버릴 때도 보도블록은 잉크빛이었다 뒤가 어두울수록 앞은 환하고 눈이 부셨다 뒤끝이 지저분한 계절이었다 (그림 : 권대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