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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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접시꽃 핀다시(詩)/마경덕 2019. 5. 26. 21:46
접시꽃 담벼락 아래 튀밥장수 영감 지루한 하품이 손풍로를 돌린다. 강냉이 마른떡국 콩, 손때 절은 깡통 일렬로 줄 맞추고 압력계기판 눈금이 달아오르면 담장 위 키다리 접시꽃이 아슬하다. 고소한 냄새에 목을 뽑은 접시꽃, 한 입만, 한 입만, 빈 접시를 내밀고 뻥! 튀밥이 날고 쨍그랑! 접시 깨지고 얄팍한 소갈머리에 뭐 담을 게 있어. 쯧쯧, 혀를 차는 영감, 평생 뻥만 치다 늙은 장돌뱅이 영감. 속 깊은 자루에 튀밥을 담는 동안 귀가 먹먹한 접시꽃, 재빨리 깨진 접시를 주워 모은다. 층층 다시 접시가 쌓이고 저 튀밥 언제 한 입 먹어보나, 쩍 입을 벌린 접시꽃, 뜨거운 햇살이 뱅글뱅글 풍로에 감기고, 담장 위 접시꽃, 얼른 새 접시를 꺼낸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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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뻐꾹채는 피고시(詩)/마경덕 2019. 5. 10. 12:16
뒷산에서 바람을 타고 마을로 내려오던 그 소리 어느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있었을까 둥지 하나 짓지 못한 어미 가슴에 발갛게 번진 봄볕에 열흘을 말려도 마르지 않는 울음이 어렴풋이 탱자울타리를 넘어오면 고모는 방아를 찧다말고 치맛자락으로 쏟아지는 가슴을 받아내고 그때 어린 내게 뻐꾸기울음이 옮겨 붙었다 뻐, 꾹, 뻐, 꾹 오래전 뻐꾸기가 되어 날아간 볕에 다 바랜 고모와 뻐꾹채 피던 그 늦봄을 나는 주머니에 가만히 담아두었다 뻐꾹채(Rhaponticum uniflorum) :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뻐꾹나물, 대화계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산중턱 이하 비탈진 곳의 건조한 풀밭에서 자생한다. 뻐꾸기가 울면 그 소리를 듣고 피어나는 꽃이라 하여 ‘뻐꾹채’라고 불린다. 또 총포잎이 겹쳐진 모습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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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슬픈 저녁시(詩)/마경덕 2018. 2. 9. 08:59
저녁에게는 누가 저녁밥을 지어주나 찬밥 한 술 뜨고 담배 한 대 태우고 한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와글와글 몰려드는 저녁들 야근을 마친 새벽 어디에 자리를 펴고 누울까? 저녁에게 눈부신 아침이 저녁이라면, 한 방울의 빛과 소음도 뼛속에 스미지 않도록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잠을 눕히고 귀를 틀어막는, 시끄러운 대낮을 저녁이라 부르는 슬픈 족속들 저 불안한 잠에게 누가 이불을 덮어주나 번번이 코피를 쏟는 저녁에게 굶지 말라고, 밤일에 몸이 축난다고, 누가 차디찬 저녁의 등을 만져주나 다시 떠오를 수 있을까? 아무 데나 등 기대면 깊은 어둠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피가 마르는 저녁들 오늘밤 졸지말자고 빈속에 커피를 석 잔이나 마시고 박카스도 마시고 검은 작업복을 걸치고, 우르르 일하러 나오는 저녁들… (그림 :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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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집단사육장시(詩)/마경덕 2017. 7. 13. 21:51
아침은 저녁에게 사육되었다 조련사가 채찍을 휘둘러 새벽을 몰고 오듯, 우리는 아침에 길들여졌다 어지러운 침대에 졸음을 묻어두고 비누거품이 묻은 일곱 시를 드라이어로 말린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흩어진 매무새를 정리한다 단추가 떨어진 지난밤처럼 우리는 물렁한 체질, 칼라믹스처럼 손자국이 나는 체질 한 번의 손짓에도 쉬 휘어진다 전철 손잡이에 매달려가는 아침 환승역에서 발을 밟히고 사육장으로 출근하면 두 손에 당근과 채찍을 든 노련한 조련사가 기다리고 있다 어서 묘기를 부려봐! 뒷짐을 진 여유 앞에 다급하게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들 명령은 코앞이고 정답은 저편에 있다 퇴근 후 몰려간 어학원 졸음이 덮치고 혀가 꼬인다 멀고 먼 나라가 입안에서 빙빙 돈다 반드시 체질을 바꾸고 말거야 조련사를 꿈꾸지만 오답에 익숙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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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깡통들시(詩)/마경덕 2017. 5. 31. 11:18
이팝꽃 피는 봄날, 꽃들의 웃음이 왁자하다 웃음에 김이 빠지기 전 꽃의 친구들 부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웨딩 카 꽁무니에 매달려 출발을 서두르는 끈에 묶인 저것들 자의든, 타의든 이미 엎질러졌다 누군가 뚜껑을 따버려 텅 빈 껍데기들 무를 수 없어, 보란 듯 화려하다 붉고 푸른 콜라 사이다 깡통들 색깔만은 청사초롱이다 하나뿐인 숨구멍으로 심호흡을 하기도 전 양가의 인연에 묶여 끌려간다 울컥, 거품을 쏟듯 소리를 내지르며 세상에 첫발을 딛는 일이 이토록 숨이 찰까 요란한 오색풍선 보닛을 덮는 과장된 리본과 하트, 사랑은 중매쟁이 입담처럼 부풀려야 한다 깡통의 절친들 들러리로 불려와 액(厄)은 저만치 물러가라 깡깡 외치고 제풀에 찌그러지는 깡통들 돌부리에 차여도 한 몸이니 끝까지 가보자고, 제발 가야한다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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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벚나무 세입자시(詩)/마경덕 2017. 4. 26. 22:05
이른 봄 벚나무는 빈방이 많다 겨우내 불 꺼진 썰렁한 방 남아도는 방은 골칫거리다 흥청망청 삼월을 탕진한 지난봄은 야반도주하고 벚나무는 버찌를 탈탈 털어냈다 그 자리가 또 가려워, - 빈방 세놓음 강변에 전단지를 붙이는 중인데, 만삭의 봄이 달려와 해거름까지 벚나무를 조른다 바람이 훈수를 들고 월세계약서에 얼른 지장을 찍는 봄 가지마다 꽃무늬벽지를 바르고 빽빽하게 방을 차지할 봄의 아이들 연신 얼굴을 맞대고 희희낙락 밤낮없이 떠들어댈 등쌀에 벚나무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붕이 없는 집 비가 오면 하늘이 샌다 계약서가 비에 찢기면 임대는 끝나지만 봄은 또 가지마다 오달지게 꽃을 낳는다 (그림 : 신종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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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객짓밥시(詩)/마경덕 2017. 4. 4. 15:27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소금쟁이를 먹이려고 죽은 곤충을 연못에 던져주고 물위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쩍 벌어진 다리를 네 개나 달아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림 : 정종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