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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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떡국 한 그릇시(詩)/박남준 2021. 2. 12. 14:54
섣달 그믐 어머니의 한숨처럼 눈발은 그치지 않고 대목장이 섰다는 면소재지로 어머니는 돈 몇 푼 쥐어 들고 집을 나서셨다 사고 싶은 것이야 많았겠지요, 가슴 아팠겠지요 섣달 그믐 대목장날 푸줏간도 큰 상점도 먼발치로 구경하고 사과며 동태 둬 마리 대목장을 봐오시네 집에 다들 있는 것인디 돈 들일 것 있느냐고 못난 아들 눈치보며 두부전, 명태전을 부치신다 큰형이 내려오면 맛보이신다고 땅 속에 묻어 뒀던 감을 내어 오시고 밤도 내어 오신다. 배도 내어 오신다 형님의 방에는 뜨근뜨근 불이 지펴지고 이불 호청도 빨아서 곱게 풀을 멕이셨다 이번 설에는 내려 오것제 토방 앞 처마끝에 불을 걸어 밝히시고 오는 잠 쫓으시며 떡대를 곱게 써신다 늬 형은 떡국을 참 잘 먹었어야 지나는 바람소리 개 짖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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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한낮 산책시(詩)/박남준 2018. 11. 6. 10:56
별들도 낡아지는걸 뭐 부쩍 시큰거리는 무릎 위안하며 겨울 햇볕 따라나선다 풍전낙하의 까치밥 위태롭게 붉은 편지가 누구에게 다급한 송신을 하는가 감나무 가지들 전깃줄을 타닥이며 문자를 보내네 한때 나도 저 전언을 해독하고는 했는데 돌무더기 서낭 옆 서어나무 당산에 마을의 안녕을 새겼을 북어가 매달렸다 이제 아무도 북어에게서 동해바다를 읽지 않으리라 북어 한 마리면 소주가 몇 병일까 심심파적을 어림 놓아보다가 물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햇살이 흰 명주 목도리처럼 맑고 푸른 겨울 산책길 (그림 : 홍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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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몽유 별빛시(詩)/박남준 2018. 10. 14. 19:34
별을 보며 길을 묻던 날이 있었다 밤짝이는 것을 생각한다 어린 날에 달음질로 두근거리다 가까이 가면 이내 빛을 거두고 말던 사금파리나 유리조각 깨어지고 부서진 것들이 반짝일 수 있다니 별처럼 무지개를 좇아 얼마나 숨차게 안타까웠던가 살아있다는 일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의 거리로 아른거리며 달아난다는 신기루 같다 툇마루에 나앉은 햇살이 어느새 마당으로 내려선다 제 속에 지닌 수분을 남김없이 토해내기까지 형벌 처럼 매달린 빨래들이 좀처럼 평행이 되지 않는 외줄을 타며 가는 햇살에 몸을 뒤척인다 이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 삶의 구비구비에 이미 묻어 두었으나 아련한 것들이 몽유로 서성인다 그때마다 침엽의 숲속이 마른 바람에 젖어 잠겨간다 문득 풍경 소리 마당을 가르는 개울물 소리 날개 없는 것들이 비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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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내 마음의 당간지주시(詩)/박남준 2017. 12. 15. 12:37
당간지주 앞에 눈길을 놓는다 오래 날들 한때 숲을 이루었고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간 여기까지 밀려와서 세상의 흥망을 읽으려 하다니 깃발을 올려 손짓할 수 없는 날들 나도 한때 펄럭여보고 싶었다 마음의 당간지주 나 이미 버린 지 오래였으나 독하게 일별한 것들이 비쭉비쭉 이제 와서 고개를 내밀다니 때로 무너지고 싶지 않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어 한번쯤 지독하게 무너지고 나서야 결국 은산 철벽 막다른 나를 알고 나서야 문득 실려오는 매화꽃 향내음 그래 강물만이 흐르는 건 아니지 당간지주 앞에 오래 머물렀다 해묵은 빚처럼 내미는 것들을 비로소 세워놓는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도리질을 치며 쏟아내는 내 마음의 고해성사 노을이 한쪽 산자락을 가만히 끌어내려 아린 눈 내리쓸어 감겨주는가 메아리만 아득하구나 저 허공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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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문포바다까지시(詩)/박남준 2017. 10. 12. 23:44
그때부터였나 문포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을 때 가지 않은 문포바다가 하나 둘 눈을 감으면 훤히 떠올랐다 작고 낡은 배 몇 척과 아이들의 코를 벌름거리게 하던 그 비린 갯내음까지 그 길을 지나가며 문포를 생각했다 포구의 모든 풍경이 내 안에서 다 그려지며 뛰어 놀았던가 문포에 갔다 동진강의 끝 문포에 갔다 문득 코를 킁킁거린다 나 벌거숭이로 내달리던 그 갯비린 내 여기가 문폽니까 문포에 가서 자꾸 문포를 되물어 본다 몇번의 발자국으로도 마을을 다 들여다본다 내 안의 저편에도 여기 쓰러지며 누운 황폐한 삶이 지독히도 발길을 묶어놓던 날들을 떠올렸다 빈집들의 잔해 그만큼이나 가득 조개껍질 무더기며 물결에 밀려온 삶이 다한 것들을 본다 떠나가고 버려진 것들 더듬이처럼 내 안의 그늘에 들어와 나도 모르게 부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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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시(詩)/박남준 2017. 10. 12. 00:57
저기 저 숲을 타고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