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조용미
-
조용미 - 나무가 되어시(詩)/조용미 2022. 3. 24. 09:30
내가 라일락, 하고 부르면 말은 벌써 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서 향내를 낸다 삼월이면 봉긋 연초록 싹을 가지마다 틔우고 스물두 해째 되는 해엔 감기 기운이 있는 하얀 꽃들을 구름처럼 피워올렸다 말의 향내로 그윽하게 차를 한잔 끓인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나무의 가지들, 퍽 퍽 입속에선 폭죽처럼 꽃망울이 터지고 몸안에서 무성하게 자라나는 가지 많은 라일락 나무 말 한마디로 나는 꽃나무가 되어 (말은 장난이 아닌데) 손바닥에 새집을 짓고 시늉처럼 서 있다 (그림 : 이현열 화백)
-
조용미 - 비자림에서 길을 잃다시(詩)/조용미 2020. 9. 2. 14:10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윽하고 어두운 초록 터널이 미로처럼 엉겨 있는,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마다 나무들로 뒤덮인 하늘이 비안개를 내뿜으며 깊은 숨을 쉬는 그 숲엔 융단 같은 이끼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있다 누구나 숲에 한번 발을 디디면 길을 잃거나 그 둥그런 세계에 금방 속하게 되고야 만다 그 안에서는 오래 화석처럼 서서 몇백년 동안 푸른 열매를 떨구어내는 일이 아주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비자향은 미혹에 가깝다 축축한 땅 위에 가득 흩어져 있는 푸른 열매들은 몸을 쩍쩍 가르며 어질머리 나는 향기를 내뿜는다 그 혼미함을 떨쳐내기란 잘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을 오래 끌고 다니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어디 먼데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한 나무들, 누구도 저 비자나무들처..
-
조용미 - 종점시(詩)/조용미 2020. 7. 7. 10:25
회촌 종점에 서 있는 34번 막차의 불빛이 비에 젖은 길을 비추고 있다 창마다 나누어진 노란 불을 밝히고 어둠 속에서 오지 않을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버스 앞을 지나오는 내 발밑으로부터 두 개의 그림자가 생겨났다 다리는 대나무처럼 길어지고 몸은 둘이 되었다 두 가닥으로 뻗어나간 그림자 중 어느 것이 내 마음에 더 가까운가 한 그림자는 휘청거리고 한 그림자는 꿋꿋하다 빛에도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는 영혼이, 고통과 열락에도 반응하지 않는 영혼이 있다면 그는 인간일까 천사일까 악마일까 내 몸에서 나와 갈라진, 명도가 약간 다른 몸의 두 어둠을 번갈아 바라본다 몸의 어둠은 채도가 없을 텐데 그림자에도 채도가 있다면 휘청거리는 저 몸의 순도는 얼마나 될까 내 몸의 무채색을 나는 오래 친애하였으나 (그림 : 이순자..
-
조용미 - 마음시(詩)/조용미 2020. 6. 24. 17:10
퍼붓는 빗속에서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헤매 다녔다 비는 지나치게 굵고 막 쏟아진 눈물처럼 뜨거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가 근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다정한데 나는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품고 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깨어났다 그녀는누구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그녀는 고요히 내 이마를 짚었다 왜 빗속을 비명을 삼키듯 울먹이며 걸어 다닌 것인지 꿈속의 나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나이다 내 이마를 짚었던 그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꿈속의 나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내가 아닌 누구인가 그 여인이 나인 것만 같다 꿈속 나의 마음은 늘 나를 조심한다 (그림 :..
-
조용미 - 일요일시(詩)/조용미 2020. 6. 13. 16:21
일요일은 나란히 앉아 있다 각자 비스듬히 앉았다 우연히도 다른 장소의 같은 시대에 산다 한 접시에 붙어 있는 계란 프라이 두 개를 정확하게 반반씩 나누어 먹는다 커피와 녹차를 마신다 일요일은 둥근테이블에 앉아 오래 책을 읽는다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조용하게 손을 씻었다 문밖과 문안에서 잠시 보았다 일요일은 눈앞에 자꾸 보이는 슬개골을 만져보게 된다 얼굴은 보지 않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요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움직일 때마다 문안과 문밖에 서 있게 된다 다른 장소의 일요일로 이동한다 서걱서걱한 일요일 송곳니 같은 인수봉을 바라본다 철학이 없는 일요일이 계속된다 (그림 : 정화백)
-
조용미 - 내가 없는 거울시(詩)/조용미 2020. 6. 7. 19:40
자다 깨어 거울 앞 지나다 얼핏 보니 내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잠깐 잘못 본 건가 다시 거울 앞으로 가기가 겁이 난다 거울 속의 나는 통증을 알지 못하여 이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가 잠시 방심하고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멀쩡한 몸을 감당하지 못하는 따분함도 그 아무 일 없음의 열락도 차마 모르는, 몸의 비루함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순정한 내가 저기 있다 여태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보았다 누군가 아마도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을 진지함을 가장한 저 세계는 지금 이 순간의 나와 가장 먼 거리에 있다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겠다 나와 마주치기 꺼려 하는 차갑고 말이 없고 고독하고 복잡한 내가 저곳에 있다 몸을 씻고 나면 늘 마주 보게 되는 그 시간만은 정확하게 잊지 않고 나..
-
조용미 - 옛집시(詩)/조용미 2018. 7. 21. 18:17
나와 동생이 탯줄을 잘랐다는 이십 년도 넘게 내버려진 폐가에 아침 안개를 걷고 올라가 보면 잡풀과 도꼬마리 옷에 쩍쩍 들러붙어 마당 어귀에서부터 발목이 잡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어떤 힘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폐허의 성(城), 깨진 옹기 뒹구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폐허와 내가 반대편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겠다 메주를 메달아 놓아 늘 쾨쾨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사랑방 문짝까지 닿으려면 허리까지 오는 잡풀들만 걷어내면 되는 것일까 길을 낼 한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는 잡풀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산맥처럼 멀다 폐허를 더듬으려면 내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면 된다 동생이 구운 참새 다리를 물고 서 있다 작은아버지가 타작을 한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삶는다 고모는 보이지 않는다 장독대 옆에 참나리가 핀다 뒤란에 까마중이 까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