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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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다리시(詩)/허림 2022. 10. 18. 06:47
시월 중순이면 내면은 초겨울에 들지요 된서리 내리기 전 무꾸와 배차 뽑아 김장을 해야 한답니다 겨울 나려면 백 포기쯤 해야 한다고 김치 곽을 파랍니다 지난겨울 김치 곽에선 고라니가 자고 가고 퇴끼 새끼가 들어 자다가 아재한테 들켜 줄행랑쳤답니다 군불 그러담은 화리에 고구마 묻고 하늘 보다가 참 별도 창창하다 낼 아침엔 된서리 내리겠네 장갑이랑 목도리랑 벙거지 찾겠다고 장농 두적대다가 구박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볕들면 콩마답 할 테니 어데 가지 말라 했는데 낼은 첫눈이 왔음 좋겠다며 무슨 약조라도 한 듯 첫눈을 기다립니다 아주 오래전 구들 아랫목에 엎드려 주간지 보며 미지의 여자와 펜팔 한다고 설레던 초겨울 일찌감치 김장하고 긴 겨울 건너는 내면에서는 저마다 다리를 놓습니다 누가 건너올까마는 간절해지는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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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시월이 가기 전에시(詩)/허림 2020. 10. 27. 18:52
아직 시월이 다 가지 않았으니 시월에 해야 할 사랑도 남은 것이다 시월에 오는 사랑은 내 곁두리를 맴돌고 푸른 이마를 조금씩 떨쳐내며 붉고 노란 작은 손을 내밀 것이다 시월에 왔으면 하는 바로 그 사랑은 살금살금 다가와서 눈을 가리고 "누구게" 하고 속삭일 것이다 나는 짐짓 그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손을 만져보고 목소리를 더듬으며 먼 먼 기억의 처음을 끌어내 늘어놓는다 시월의 사랑은 이미 와 있었는데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았을 뿐 아직 시월이 다 가지 않았으니 시월에 해야 할 사랑은 더 붉어질 것이다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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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도토리시(詩)/허림 2020. 10. 8. 17:26
참나무 꽃을 본 적 없다니까 촌놈이 그것도 못 봤냐 그러면서 도토리를 줍냐 정말 참나무는 꽃을 피우기나 하는 걸까 참나무 꽃을 꽃으로 보지 않은 그야말로 꽃을 꽃으로 보지 않은 탓이다 누가 꽃을 정의하였나 분명, 피고 지는 참나무 꽃 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편협한 고집들 세상의 꽃은 허울과 허물을 쓰거나 화장을 하고 밤의 조명 아래서 유혹하는 수천수만 빛의 광란이기도 한 꽃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꽃으로 피었으니 나도 꽃이다 꽃이면서 꽃인 척 참나무는 참회록 한 줄 쓴 적 없으나 어두운 지붕 위 툭 툭툭 선잠마저 깨우는 가을밤 내 생의 저쪽에서는 도토리 주워놔 묵 쑤어 먹자 문자가 날아오고 있다 (그림 : 안정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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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김을 매다가 호미 자루가 빠졌다시(詩)/허림 2020. 10. 2. 13:59
뿌리가 깊었든가 돌에 걸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대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휑하였다 밭 두럭에 씨앗을 넣을 때도 호미 자루 되박는 일이 잦아졌다 마음이 돌아난 자리마다 풀이 무성했다 고랑에선 고라니가 새끼를 쳐 갔고 희고 붉은 꽃들이 읽어낸 그림자가 누워 있었다 바람이 불자 마른 꽃씨가 날았다 서로 가야 할 또 다른 세계는 어딜까 한 몸을 이루었지만 늘 겉돌았다 별 도리 없는, 헐거워진 생의 안부를 묻는 먼 곳의 전화는 뜸했고 눈이 자주 내렸다 먼 길까지 마중 삼아 눈길을 냈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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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 메물능쟁이시(詩)/허림 2020. 9. 21. 18:10
니 내 좋아했는데 서산 어디 산다는 분산이가 오십 년 만에 와서 한 말이다 혼잣말 같기도 하고 들으라고 한 말 같기도 한데 모라고 못 들었으면 말고 그때 붉은데이 오면 능쟁이 해주려 했는데 한 번을 안 오데 서운하더라 그래서 내면 떠났다 지금이라도 만들어주지 됐다 말로 해줄게 통메물 찰강냉이가루 없으면 멧옥씨기가루 좁쌀을 준비해 그런 다음 노강지에 물을 넉넉히 붓고 메물 넣고 푹 능궈지도록 죽을 쒀 푹 퍼졌다 싶으면 찰강냉이가루와 좁쌀 나물 좀 넣고 눌어붙지 않게 능구면 돼 능구는 게 뭔데 내가 니 속에 들어가도록 속을 푹 늘궈놓는 거지 한번 먹고 싶다 메물능쟁이 같은 저녁을 메물능쟁이 : 메밀, 찰옥수수가루 혹은 멧옥수수가루, 능쟁이를 넣어 만든 전병 능쟁이 : 명아주나물을 묵나물로 만든 것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