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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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위험한 골목시(詩)/이명윤 2019. 9. 18. 12:24
1 그 골목엔 구멍이 많다 아이들 대부분은 연탄구멍에서 나왔다 구멍 숭숭한 슬레이트지붕 아래 잠자고 지갑의 구멍을 보여주는 여자에게 구멍 난 얼굴을 하고 학교에 가면 선생들은 구멍환경조사를 한다 골목 담벼락에 구멍을 그려 놓고 킬킬 웃기도 하고 공터에서 구멍을 파고 놀며 구멍으로 세상을 보기도 한다 아이들 몸에 가득한 구멍들 구멍의 색깔은 링거액처럼 노랗다 2 간판이 기우뚱한 구멍가게에선 유통기한이 없는 구멍을 판다 와장창 밤의 고요에 구멍을 내는 골목의 남자 구멍에 악다구니를 퍼붓는 골목의 여자 눈두덩에 푸른 멍이 드는 골목의 저녁마다 구멍은 상처를 먹고 달처럼 자란다 가끔은 여러 개의 구멍을 품은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한 채 사라지는 지독한 구멍의 골목 도둑고양이 담장에 엎드려 야아옹 울음을 둥글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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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동피랑 부르스시(詩)/이명윤 2019. 9. 18. 12:22
어느 천사가 가난한 날의 등에 무수한 키스를 남겨놓고 떠났을까 골목담장마다 추억의 나무가 자라고 나뭇가지마다 천 개의 손이 열려 있는 동네 철부지 아이들이 시간 속으로 뛰어다니고 오색 물고기가 언덕을 타고 오르는 동네 집채만 한 꽃이 주인마냥 피어있고 큰 무지개가 온종일 걸려 있는 꿈같은 동네 무서운 용역대신 눈빛 선한 화가들이 다녀간 동네 망치대신 붓을 들고 세월의 고단함을 철거해 버린 동네 최루탄 대신 푸른 물감이 웃음으로 번져나가는 아름다운 하늘동네 친구야, 오늘은 동피랑 가자 포크레인으로 밀어붙이고 망치로 두들겨 사람도 울음도 그림자도 흔적 없이 사라져야 다시 동전 같은 눈을 뜨는 도시에서 누가 느닷없이 세월을 떠올렸을까 당신의 수많은 발자국을 품고 있는 골목과 이웃들의 왁자한 목소리를 기억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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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사무직 K씨시(詩)/이명윤 2019. 9. 18. 12:20
자판은 빵을 굽거나 생선을 튀길 수 있다 자판에서 밥이 나오고 월세가 나오고 밀린 전기요금이 나온다 숙련된 손이 자판을 두드리면 다각, 다각, 다다다각, 모니터 속에 발자국을 남기며 그가 달린다 그의 눈을 자세히 보면 분해된 자음과 모음과 숫자와 이름 모를 기호들이 물고기처럼 유영한다 언젠가 그가 심혈을 기울려 만든 새 이름의 상품이 어디론가 날아간 뒤 온 우주를 뻘뻘 뒤지다 돌아온 그는 수시로 시간을 저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각, 다각, 다각각, 다다다다다, 생각의 재봉틀로 밥이 조립되고 단추 구멍 같은 시간 속으로 그가 달린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는 땀을 거의 흘리지 않는다 두 눈이 낮달처럼 휑하거나 뒷골이 팍팍 댕기는 것은 노동의 갸륵한 표식이다 그의 바지는 늘 깨끗하고 바지 속 두 다리는 식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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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질문시(詩)/이명윤 2019. 9. 18. 12:18
통 기억이 안 난단다 이름을 말하셔야 재발급해 드리죠 다른 가족 분은 없으세요 홀로 사신 지 이십오 년, 아들 하나 있는데 십년 넘게 소식이 없단다 사람들이 부르던 할머니 이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아침부터 찾아와 지갑 잃어버렸다며 울상 짓던 할머니가 재발급 수수료가 비싸다며 깎아 달라던 할머니가 이름을 물어보자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는다 기억 속의 이름은 어디로 갔을까 아주 어릴 적 친구들이 정답게 부르던 이름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며 애타게 부르던 이름 돌아가신 할아버지 젊은 날 어느 오동나무 아래서 두 번 세 번 손 흔들며 불렀을 이름 어느 날 문득 새처럼 훨훨 유년 속으로 날아가 버렸을까 할머니 몰래 얼굴의 검버섯 속에 꼭꼭 숨어 버렸을까 이름을 찾아 꼭 다시 오세요 한참 동안 허공을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