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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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살구꽃시(詩)/송찬호 2017. 12. 15. 12:20
살구꽃이 잠깐 피었다 졌다 살구꽃 양산을 사지는 않고 그냥 가격만 물어보고 슬그머니 접어 내려놓듯이 정말 우리는 살구꽃이 잠깐이라는 걸 안다 봄의 절정인 어느날 살구꽃이 벌들과 혼인여행을 떠나버리면, 남은 살구나무는 꽃이 없어도 그게 누구네 나무라는 걸 훤히 알듯이 재봉틀 밟는 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수선집이고 종일 망치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철공소라는 걸 멀리서도 알고 있듯이 살구나무와 연애 한 번 하지 않아도 살구나무가 입은 속옷이 연분홍 빤쓰라는 걸 속으로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림 : 문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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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당나귀시(詩)/송찬호 2017. 9. 12. 10:04
이런 집이 있다 구름 안장만 얹어놓아도 힘들다고 등이 푹 꺼지는 게으른 집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갑다고 방울 소리 울리는 늙고 꾀 많은 집 그래도 그것을 집이라고 나는, 생활을 고삐에 단단히 매둘 요량으로 집 앞 물가에 버드나무도 한 그루 심고 나귀가 좋아하는 호밀의 씨도 뿌렸다 그리고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호밀 한 자루 팔아 거위를 사고 거위를 팔아 양을 사고 양을 팔아 구름을 사면 언제 그런 부귀의 구름 위에 사는 날이 오기는 할까 벌써 버드나무는 지붕보다 높이 자라고 바람은 날마다 호밀의 귀를 간질이는데, 아직도 이런 집이 있다 해가 중천인데도 창문에 눈곱이 덕지덕지한 집 집 뒤 갈밭에 커다란 임금님 귀가 산다고 소리쳐도 들었는지 말았는지 기척 하나 없는 여전히 모르쇠의 집 (그림 :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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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이슬시(詩)/송찬호 2017. 7. 24. 21:55
나는 한때 이슬을 잡으러 다녔다 새벽이나 이른 아침 물병 하나 들고 풀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이란 벌레를 이슬이란 벌레를 잡기는 쉬웠다 지나간 밤 꿈이 무서운지 어디 튀어 달아나지 못하고 곧장 땅으로 뛰어내리니까 그래도 포획은 조심스러웠다 잘못 건드려 죽으면 이슬은 돌처럼 딱딱해지니까 나는 한때 불과 흙과 공기의 조화로운 건축을 꿈꿨으나 흙은 무한증식의 자본이 되고 불은 폭력이 되고 나머지도 너무 멀리 있는 공기의 사원이 되었으니 돌이켜 보면 모두 헛된 꿈 이슬은 물의 보석, 한번 모아볼 만하지 기껏 잡아놓은 것이 겨우 종아리만 적실지라도 이른 아침 산책길 숲이 들려주던 말, 뛰지 말고 걸어라 너의 천국이 그 종아리에 있으니 (그림 : 김기택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