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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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백일홍시(詩)/송찬호 2016. 8. 3. 10:11
담벼락 아래 옹기종기 모여 노는 대가리 부스럼투성이 백일홍들 공기놀이하는 백일홍 물구나무서기하는 백일홍 양식 구하러 간 엄마 언제 오나 까치발 하여 멀리 동구 밖 내다보는 백일홍 놀다 허기지면 우물가에 내려가 한 바가지씩 물배를 채우고 오뉴월 땡볕 똥글똥글 궁굴려 가는 쇠똥구리 백일홍 다섯 살 막내 졸졸 따라다니며 누런 코 핥아 먹는 강아지 백일홍 이담에 크면 우리 여기다 커다란 꽃밭을 만들자 그다음 여기 꽃밭에다 뽐뿌를 박고 촐랑촐랑 여기서 퍼올린 물로 분홍물 다홍물 장사를하자 그때 골목을 들어오시던 어머니, 일평생 그날 단 하루 신식 여성이셨던 우리 어머니 그날 친정 갔다 얻어 입고 온 허름한 비로드 양장 치마저고리 그때 처녀 적 수줍음처럼 어머니 가슴에서 반짝이던 빠알간 백일홍 브로치!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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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고래의 꿈시(詩)/송찬호 2015. 10. 23. 12:35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한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펄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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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뜨개질, 그 후시(詩)/송찬호 2015. 10. 2. 12:14
그리하여 커가는 아이의 치수에 맞춰 얼마나 많은 기다림을 짜고 풀어내고 짜고 풀어내고 하였던가 세월이 흘러도 그 집은 오래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언젠가 나도 그 앞을 지나가다 불빛에 들킨 적 있다 거기 문밖에 누가 와서 울고 있니? 희망이냐, 희망이냐 불빛은 미동도 없이 고요히 타오르고 있었다 뜨개질은 멈출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때의 그 나지막한 읊조림을 무어라 할까 창문의 그 꺼지지 않고 옹송그리는 그림자를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입술을 지나가는 그들의 노래를 (그림 : 장임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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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칸나시(詩)/송찬호 2015. 3. 25. 18:19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항상 발갛게 목이 부은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이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숲이 휙휙 지나가 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 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구리고 앉아 초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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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찔레꽃시(詩)/송찬호 2014. 6. 8. 22:31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앴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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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가을시(詩)/송찬호 2014. 1. 13. 11:18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