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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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봄밤시(詩)/송찬호 2013. 12. 20. 20:13
낡은 봉고를 끌고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어물전을 펴는 친구가 근 일 년 만에 밤늦게 찾아왔다 해마다 봄이면 저 뒤란 감나무에 두견이 놈이 찾아와서 몇 날 며칠을 밤새도록 피를 토하고 울다 가곤 하지 그러면 가지마다 이렇게 애틋한 감잎이 돋아나는데 이 감잎차가 바로 그 두견이 혓바닥을 뜯어 우려낸 차라네 나같이 쓰라린 인간 속을 다스리는 데 아주 그만이지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그 쓰린 삶을 다스려낸다는 거! 눈썹이 하얘지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 일찍 그 친구는 상주장으로 훌쩍 떠나갔다 문가에 고등어 몇 마리 슬며시 내려놓고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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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문(門) 앞에서시(詩)/송찬호 2013. 12. 20. 20:13
대가리를 꼿꼿이 치켜든 독 오른 뱀 앞에 개구리 홀로 얼어붙은 듯 가부좌를 틀고 있다 비늘 돋친 이 독한 세상마저 잊어버리려는 듯 투명한 눈을 반쯤 내려감은 채 마른 번개 널름거리는 캄캄한 아가리 속 꿈틀거리는 욕망이여, 온몸 징그러운 무늬의 삶이여 예서 길이 끝나는구나 벼랑 끝에 서고 보니 길 없는 깊은 세상이 더 가까워 보이는구나 마지막 한 걸음, 뒤에서 등을 밀어 그래, 가자 가자 신 한 켤레 놓여 있는 물가 멀리 깁고 기운 물갈퀴 하나 또 한세상 힘겹게 건너고 있다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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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시(詩)/송찬호 2013. 12. 20. 20:12
무릇 생명이 태어나는 경계에는 어느 곳이나 올가미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에 저렇게 떨림이 있지 않겠어요? 꽃을 밀어내느라 거친 옹이가 박힌 허리를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저 늙은 동백나무를 보아요 그 아득한 올가미를 빠져나오려 짐승의 새끼처럼 다리를 모으고 세차게 머리로 가지를 찢고 나오는 동백꽃을 이리 가까이 와 보아요 향일암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도 검푸른 잎사귀로 그 어린 꽃을 살짝 가려주네요 그러니 동백이 저리 붉은 거지요 그러니 동백을 짐승을 닮은 꽃이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림 : 김한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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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촛불시(詩)/송찬호 2013. 12. 20. 20:12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그림 : 이성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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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늙은 산벚나무시(詩)/송찬호 2013. 12. 20. 20:11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기라 그때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내미는기라 (그림 : 류은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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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 소금 창고시(詩)/송찬호 2013. 12. 20. 20:10
돈 떼먹고 도망간 여자를 찾아 물어물어 여기 소금창고까지 왔네 소금창고는 아무도 없네 이미 오래전부터 소금이 들어오지 않아 소금창고는 텅 비어 있었네 나는 이미 짐작한 바가 있어 얼굴 흰 소금 신부를 맞으러 서쪽으로 가는 바람같이 무슨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온 건 아니지만 나는 또, 사슴 같은 바다를 보러 온 젊은 날같이 연애창고인 줄만 알고 손을 잡고 뛰어드는 젊은 날같이 함부로 이 소금창고를 찾아온 것도 아니지만 가까이 보이는 바다로 쉬지 않고 술들의 배가 지나갔네 나는 그토록 다짐했던 금주(禁酒)의 맹세가 생각나 또, 여자의 머릿결 적시던 술이 생각나 바닷가에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울었네 소금창고는 아무도 없네 그리고 짜디짠 이 세상 어디엔가 소금같이 뿌려진 여자가 있네 나는 또, 어딘가로 돌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