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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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놓고 오거나 놓고 가거나시(詩)/허영숙 2022. 5. 18. 18:54
언제부터 있었나 저 우산 산 적 없는 낯선 우산이 꽂혀 있다 비올 때 내게 왔다가 비 그치자 가버린 사람이 두고 간 것 오래 거기 있는 줄 모르고, 손잡이의 지문 아직 남아 있는 줄도 모르고, 나도 어디 놓고 온 우산은 없나 누가 펼쳐보고 내가 놓고 간 우산인지도 모르고 적셨다 말리며 적셨다 말리며 밥집으로 찻집으로 녹을 키우며 흘러가고 있을까 비올 때 간절하다 햇살 돌면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살 부러져 주저앉을 때까지 손잡이 지문을 바꾸는 저 우산은 호적이 없다 (그림 : 황규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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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곡우시(詩)/허영숙 2022. 5. 18. 18:42
비 오자 겨우 논물 드는데 다 버리고 남도로 간다는 당신의 말은 슬펐네 곳간의 단단한 볍씨 같은 말 땅 헐거워지면 뿌려지고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더라도 당신이나 나나 살아가고 살아지고 제 한 몸 스스로 거두는 나무도 꽃을 버리고 허공을 비워두네 물자리 깊은데 서로 엉성한 절기를 지나네 고랑 터는 비라 하더라도 아프게 우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어서 하늘을 다그치네 구름이 숨차게 뒤를 따르네 청명 지나 입하사이 한 사람이 깊숙이 숨네 올해는 울음도 풍년이어서 그 질긴 곡식 낫질하느라 손 마디마디 붉게 헐겠네 곡우(穀雨) : 24절기의 여섯 번째 절기. 곡우(穀雨)는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있으며, 음력 3월 중순경으로, 양력 4월 20일 무렵에 해당한다. 곡우의 의미는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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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나비그림에 쓰다시(詩)/허영숙 2022. 5. 18. 18:40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 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그림 : 이수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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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할증된 거리에서시(詩)/허영숙 2019. 7. 19. 23:10
따뜻한 불빛이 있는 쪽으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어둠만 곱으로 남았다 중앙선만 선명한 자정이 넘은 거리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할증된 사연을 안고 떠다니는 사람들 속으로 가로등이 뱉는 황색 불빛이 섞인다 준비도 안된 가슴 안으로 초단위로 들어와 앉는 낮이 저질러 놓은 하루의 풍경들 돌아보면 늘 서럽기만 한 시간이 지나온 길 뒤에 버려지듯 서있다 색깔을 잃어버린 신호등 연신 노란 불만 깜박인다 시작과 멈춤의 잣대가 없으니 알아서 가란 소리다 파란불이 주는 익숙한 편안에 길들여진 나는 이 무책임한 경계에서 어쩌라는 것인지 망설임이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차들은 휙휙 제한 속도를 넘기며 지나가고 있다 (그림 : 김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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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반곡지 버드나무시(詩)/허영숙 2019. 7. 19. 22:57
억지로 데려다 놓은 사람처럼 겉돌던 여자 저수지에 발이 묶였다 할 말을 다 쓰려고 바람 불 때 마다 구겨지는 화선지 결이 팽팽해지기를 기다린지 오래 그동안 붓솔의 길이만 자라 아무것도 쓰지 못한 저수지에는 초록 낙관의 그림자만 서늘하다 자꾸만 휘어지는 문장들이 서럽게 울 때는 붓을 거머쥔 손에서 푸른빛이 스스로 죽고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초서체의 말들 쓰지도 못하고 물밑에 가라앉는다 백년을 늙어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는 물가 모천으로 가는 연어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참았던 말을 쏟아 낼 일필의 그때를 기다리는 것 버드나무 그 여자 바라보는 건너편 여자 뭉클한 구름이 뒤꿈치를 들고 물 위를 띄엄띄엄 건너간다 (그림 : 강석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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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봄, 본제입납시(詩)/허영숙 2018. 5. 12. 20:29
- 어느 실직자의 편지 봄은 땅을 지펴 온 산에 꽃을 한 솥밥 해 놓았는데 빈 숟가락 들고 허공만 자꾸 퍼대고 있는 계절입니다 라고 쓰고 나니 아직 쓰지 않은 행간이 젖는다 벚꽃 잎처럼 쌓이는 이력서 골목을 열 번이나 돌고 올라오는 옥탑방에도 드문드문 봄이 기웃거리는지, 오래 꽃 핀 적 없는 화분 사이 그 가혹한 틈으로 핀 민들레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봄볕과 일가를 이루고 있다 꽃들이 지고 명함 한 장 손에 쥐는 다음 계절에는 빈 손 말고 작약 한 꾸러미 안고 찾아 뵙겠습니다 라는 말은 빈 약속 같아 차마 쓰지 못하고 선자의 눈빛만으로도 당락의 갈피를 읽는 눈치만 무럭무럭 자라 빈한의 담을 넘어간다 라고도 차마 쓰지 못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다 그치는 봄날의 사랑 말고 생선 살점 발라 밥숟갈 위에 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