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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영숙 - 봄, 본제입납
    시(詩)/허영숙 2018. 5. 12. 20:29


    - 어느 실직자의 편지
    봄은 땅을 지펴 온 산에 꽃을 한 솥밥 해 놓았는데 빈 숟가락 들고 허공만 자꾸 퍼대고 있는 계절입니다
    라고 쓰고 나니
    아직 쓰지 않은 행간이 젖는다

    벚꽃 잎처럼 쌓이는 이력서

    골목을 열 번이나 돌고 올라오는 옥탑방에도
    드문드문 봄이 기웃거리는지,
    오래 꽃 핀 적 없는 화분 사이
    그 가혹한 틈으로 핀 민들레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봄볕과 일가를 이루고 있다

    꽃들이 지고 명함 한 장 손에 쥐는 다음 계절에는 빈 손 말고
    작약 한 꾸러미 안고 찾아 뵙겠습니다 라는 말은
    빈 약속 같아 차마 쓰지 못하고

    선자의 눈빛만으로도 당락의 갈피를 읽는 눈치만 무럭무럭 자라 빈한의 담을 넘어간다 라고도 차마 쓰지 못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다 그치는 봄날의 사랑 말고 생선 살점 발라 밥숟갈 위에 얹어 주던
    오래 지긋한 사랑이 그립다 쓰고
    방점을 무수히 찍는다. 연두가 짙고서야 봄이 왔다 갔음을 아는
    햇빛만 부유한 이 계절에,

    본제입납(本第入納) : 자기 집에 편지할 때에 겉봉 표면에 자기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쓰는 말.  본가입납(本家入納)의 동의어

    (그림 : 윤종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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