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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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혜화동시(詩)/강은교 2023. 7. 3. 14:32
―어느 황혼을 위하여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곳,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늦은 오후면 햇살 비스듬히 비추며 사람들은 거기서 두런두런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다 내다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걷는 것을, 그러다 듣는다, 슬며시 고개 들이미는 저물녘 바람 소리를 오래된 플라타너스 한 그루 그 앞에 서 있다, 이파리들이 황혼 속에서 익어간다, 이파리들은 하늘에 거대한 정원을 세운다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실뿌리들은 저녁잠들을 향하여 가는 발들을 뻗고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거대한 추억들 곁에 함초롬히 서 있는 곳 허기진 너는 흠집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이파리들이 꿈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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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시(詩)/강은교 2023. 4. 8. 07:11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불쑥 나타날 너의 힘을 기다린다 너의 힘이 심줄들을 부드럽게 하고 너의 힘이 핏대들을 쓰다듬으며 너의 힘이 눈부신 햇살처럼 민들레 노란 꽃잎 속으로 나를 끌고 갈 때 내가 노란 민들레 속살로 물들고 말 때 얼음의 혓바닥이 흔들거리며 얼음의 왼발이 사라지고 얼음의 왼다리가 사라지고 이윽고 얼음의 오른발이 사라지고 얼음의 오른다리가 사라지고 낮게 낮게 흐르는 눈물이 시간이 될 때 그때를 기다린다 아무도 몰래 너를 이 바람 찬 세상에서 (그림 : 이흥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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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꽃잎 한 장시(詩)/강은교 2022. 8. 1. 21:44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보았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창가로 끌고 왔습니다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고서야 꽃을 마음 끝에 매달았습니다 꽃잎 한 장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저 꽃을 마음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창가에 여직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이 나를 마음따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흰 구름이 여직 창틀에 남아 흩날리는 것은 우리 서로 마음의 심연에 심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람 몹시 부는 날에도 (그림 : 한부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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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발목, 기타기타시(詩)/강은교 2017. 10. 23. 22:49
내 몸을 받드느라 정말 힘들겠소, 내 발목이여 내 정글 같은 마음 편히 모시느라 내 허리여 심장이여 얼마나 힘들었소? 내 신장이여, 내장들이여, 배여, 눈썹이여, 눈까풀이여 내 생각을 받드느라 높이 솟은 이마여 내 옷, 내 가방, 무지갯빛 희망을 걸머멘 단단한 내 어깨여, 끈질긴 내 손목이여, 힘줄이여, 힘줄도 새파란 내 팔이여 내 못생긴 발톱이여, 손톱이여 생각걸개여 하루도 편히 쉴 알 없이 숨을 거둬들이고 내뱉는, 하루 종일 편히 쉴 날 없이 피를 뿜어내느라 정신이 없는 나의 심장이여, 허파여, 비정규직 내 쓸개여 언제 없어질까 몰라 늘 발발 떨고 있는 내 쓸개여 아 종신의 인공 무릎이여 달아나기만 달아나기만 하는 잠이여 달아나기만 달아나기만 하는 꿈이여, 꿈의 날개여, 꿈 같은 당신들이여 신처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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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 왜 그걸 못보았을까시(詩)/강은교 2017. 5. 20. 10:45
왜 그숲에 서서 등 뒤에 핀 벚꽃을 못보았을까, 등 뒤에서 몸을 뒤집고 있는 백양나무 입을 못보았을까, 백양나무 푸른 등 위에서 마악 몸을 뒤채는 빗방울의 동그란 입술 한 빗방울이 옆 빗방울에게 사색이 되어 소리친다, 밀치지 마, 떨어질 것 같아, 왜 그걸 못보았을까 그 터널을 나가다 보면 길들이 서로 껴안고 있다가 헛발질하며 후다닥 떨어지는 걸 터널 양쪽의 언덕이 글썽글썽 눈물 그걸 주욱 보고 있는 걸 거기 어물거리는, 어물거리기만 하는 얼굴 잔뜩 부푼 구름이라든가 구름에 닿도록 팔들을 쳐들고 서서 손부리가 화들짝 놀랄 때까지 하늘을 잔채질하는 넝쿨들을 동편하늘의 젓가슴을 만지작거리러 오늘도 새들이 일렬종대로 달려가는 것을. 왜 큰 것만 보았었을까. (그림 : 남택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