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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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강화 북쪽시(詩)/박일만 2022. 5. 18. 20:56
동해에서 내처 달려온 철책이 간격을 더 벌려 마주 선다 물길을 한껏 끌어안은 탓이다 강이 빗장을 풀어 바다를 껴안고 물과 물이 몸을 섞고 피를 나눈다 건너편 깃발은 시대를 아는 듯 각을 접었고 대신 빨래가 병영을 지키며 나풀거린다 나무들끼리 가끔은 초병을 흉내 내며 강 건너에 대고 거수경례를 한다 양 갈래로 둘려진 철책너머로 어부들은 출항했다가 해가 지기 전 돌아온다 늦으면 이데올로기의 낙오자가 될 것이다 바람 부는 날에는 돌아갈 곳을 잃은 두루미들이 외발로 초병 대신 경계근무를 서면 눈길을 피해 물고기들은 더욱 깊이 가라앉는다 한방에 먹이를 물어야한다는 수칙은 이미 오래된 전략, 그 많은 세월동안 바라보다 이념은 빛이 바래고 강은 늘 출렁이며, 출렁거리며 제 속에 앞뒤 산천의 그림자를 죄다 끌어 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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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봄, 들키다시(詩)/박일만 2021. 3. 19. 15:08
문자가 왔다, 사랑한다고 꼬리에 하트 몇 개 달고 느닷없이 왔다 누굴까, 생소한 번호 너머에서 버튼을 누른 사람은 혹여, 술청에서 잠시 손잡고 놀던 여잘까 노래방에서 낙지처럼 몸 비비던 여잔가 머릿속은 하얗고 기억은 촉수가 낮았다 허랑방탕 시절 하룻밤 풋사랑이었을 거야 애써 갈무리하는데 또 다시 왔다 죄송 …… 잘못 …… 술이 좀 …… 염병할! 지금이 어느 땐데 장난치고 지랄이야! 고목나무에 꽃 필 일 전혀 없거든! 속으로 냅다 질렀는데 갑자기 측은지심이 발동한 거라 얼마나 그리웠으면 다 늦은 시간까지 술을 퍼! 얼마나 못 견뎠으면 손가락 스텝이 엉켜! 그의 사랑이 존경 쪽으로 기우는데 만화방창, 창밖에는 봄꽃들이 향기를 뿜어대고요 죄가 있다면 꽃들이 내 전력을 들춰냈을 뿐 그는 죄가 없고 나에게 내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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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회덕분기점시(詩)/박일만 2019. 12. 2. 18:01
강낭콩 줄기 따라 남으로 간다 꽃을 보고자 뻗어가는 길마다 살이 오르고 햇살같이 밝은 핏줄이 펼쳐진다 내밀한 역사를 포장한 도로에 솜털이 돋아 이슬과 비바람을 떨쳐내며 굵게 자란다 가던 길이 막 끝나자마자 길이 다시 시작되어 푸른 가지로 뻗는, 좌로 가면 우듬지 우로 가면 잎사귀 너머이므로 한 몸이 두 갈래로 영영 이별이겠으나 되돌아 갈 수도 머뭇댈 수도 없는 즈음에 나는 더욱 명료해진다 살다 보면 좌인지 우인지 방향지시등을 깜빡 잊을 때도 있지 않은가 속도에 갇혀 미처 손짓도 없이 사라지는 얼굴들 옆모습이 마냥 쓸쓸하다 나의 생이 갈 길을 몰랐을 때에도 길은 거기 있었으나 내가 가는 길이 옛길인지 신작로인지 분간 못할 때 느닷없이 갈라졌던 두 몸의 덩굴 끝에서 한 몸의 푸른 바다가 넘실댄다 길 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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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가로등시(詩)/박일만 2019. 8. 15. 16:30
버섯 모양 고깔 대신 밀짚모자를 즐겨 쓰시던 아버지 밤낮을 땅만 지켜보던 몸이셨다 허리 한번 굽힐 날 없이 돌부처도 되지 못하고 평생을 그렇게 땅을 일구셨다 허리띠를 조여야만 하는 시절을 견디는 일이란 엄동에 묵정밭을 일구는 일이나 매 한가지였으니 전봇대에 간신히 매달려 사는 아찔한 몸으로 키 낮은 잡초와 가족들을 돌보았으니 옷 한 벌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돌밭을 개간한 근성도 이제는 쌓이는 연륜에 어찌할 방도가 없나 보다 낡아간다 아버지의 허름한 옷차림, 덕지덕지 붙은 전단지, 고단한 노동 뒤에 오는 관절의 진통에도 잠시 눕지도 못하는 직립형 태생이셨다 하늘로 가시는 길을 몸소 닦아 놓은 것일까 바닥을 일궈낸 무수한 씨앗들이 비상하듯 솟아났다 그 좋은 하늘을 버리고 바닥을 택했던 끈질긴 외눈 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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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주소지시(詩)/박일만 2019. 8. 15. 16:26
연대의식이 담장과 담장을 잇는 거기에 있습니다 끝간데 없이 다리 뻗고 무리들과 어깨 견주며 지적도 위 한 점으로 있습니다 싹을 틔운 점 줄기 뻗고 날개 펴고 식솔 매달고 발목 붙잡힌 나무되어 갑니다 낡아가는 집 한 채에도 익숙하게 마음 붙이고 살아가는 생의 좌표 우편물이 오차없이 배달되고 꽃바람도 이웃인양 들고 납니다 외출에서 돌아와도 흔적 쉽게 발견하듯 한 곳에 머무를수록 깊어지는 나의 뿌리 땅속 물길까지도 훤히 가늠하는, 참으로 관습적인 행보로 서 있습니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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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빚진 봄시(詩)/박일만 2019. 8. 15. 16:19
동네를 몇 바퀴 돌아도 심심했지 애꿎은 검둥이만 걷어차고 언덕으로 치달으면 제비꽃, 날개 들어 기지개 켰지 어른들이 들일 나간 텅 빈 계절 제비가 식솔들 앞세우고 돌아오느라 하늘에 대고 동그라미를 치는 날은 할미꽃, 뫼똥같은 미소 연신 날렸지 방직공장으로 돈 벌로 간 나이어린 누나는 꽃잎이 다 져도 오지 않았고 남풍만 서슴없이 불어왔지 성급한 마음만 온 들판을 싸돌았지 그때도 개나리, 노란 웃음 지천이었지 끌어다 쓴 영농자금이 빚으로 쫓아다니고 넉넉지 않은 가세로 혼인없이 살다가 십수년을 건너 혼례를 치르시던 부모님 진달래, 정말 붉은 고백이었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하루해가 길쭉했던 내 아릿한 초상(肖像) 이제는 뒷모습도 안 보여주는 이왕지사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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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네거리에서 길을 잃다시(詩)/박일만 2019. 8. 15. 16:18
이곳에 오면 늘 어지럼증을 앓는다 황급히 달려가는 꽁무니를 따라가야 할지 조금은 이유 있는 직진신호를 기다려야 할지 그도 아니면 외면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의기양양하게 가야할지 머릿속을 휘 감는 물음표와 맞서곤 한다 얼마나 많은 길을 가는 가 우리는 넓은 길, 좁은 길, 휘어진 길, 비탈진 길, 마음 내키지 않게 잘 정돈된 길, 뜻하지도 않게 조종되어 가는 길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길을 가야 한다 수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기우뚱 거리며 한 치 앞도 모를 현실에 혜안을 잃고 속살 해지는 길바닥에 감각을 뜯기며 무던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설픈 몸짓들만 수북하게 쌓이는 네거리에서 쏜 살같이 달려가기도 하고 우두커니 기다리기도 하며 자꾸 길을 묻는다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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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 노량진역시(詩)/박일만 2019. 8. 10. 16:15
철로 건너에서 끼쳐오는 물 냄새 한강을 헤엄쳐 온 물고기들 땀 냄새 강은 환승역이다 작은 물고기들 공중으로 떠오를 부레를 키워가는, 북적대는 흙냄새도 자욱하다 인생역전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고시원 사람들의 등허리에 피는 지느러미 취업의 공식을 풀다가 지친 눈빛으로 가득히 모여드는 포장마차 즐비한 골목길 세상 끝에서 모여 끝을 찾아가는 발걸음들 끊임없이 분주하다 눈물도 사치인 공간 낡은 빌딩 벽에 가득히 새겨 놓은 다짐들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냄새 많은 공간을 채워가는 작은 몸짓일지니 얼룩진 골목 일수록 머물다간 사람이 많다 한강을 바라보며 수없이 꿈틀대는 꿈들이 모여 현재에도 미래에도 오래된 냄새에 젖는, (그림 : 백준승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