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일만
-
박일만 - 막장, 그때시(詩)/박일만 2019. 8. 10. 16:11
경사진 삶이 시멘트 길을 만날 때 마다 나는 산문(山門)을 열고 달려 나오는 검은 발원지를 찾아 나섰다 햇빛도 들지 않던 공간 속에서 청춘을 검게 닦으며 숲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슬픈 소리를 가슴 가득 채웠다 지상을 꿈꾸는 동굴 저 만치 세상살이에 미숙아인 검은 내가 이마엔 탐색의 더듬이를 달고 붉은 심장으로 서 있었다 이름 모를 들꽃 흐드러진 그곳, 검은 마을에선 기계소리 요란하고 밥 짓는 연기가 날아올랐다 지축을 흔드는 자본주의의 발자국에 짓눌려서도 질경이는 단단한 땅을 밀고 올라왔다 은빛 달무리 뜰 무렵 불씨를 캐던 나의 땀에 은밀한 날개가 돋았다 (그림 : 박진수 화백)
-
박일만 - 육십령 2시(詩)/박일만 2019. 8. 10. 15:57
겨울이 막 떠난 논밭에다 들불을 지피며 자운영 꽃이 피었지 산속 토끼들도 배가 고프던 시절 분홍빛 튀밥이 지천으로 터지고 꽃밭에 누워 나는 시장기를 몰래 달래곤 했었지 자운영이 한창일 무렵이면 게으른 소를 앞세워 남의 논 써레질 품팔이를 하시던 아버지 곁에서 나는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에게 피를 나눠주곤 했었지 파랗게 비워진 하늘에서 공중돌기를 하며 강남제비가 돌아오는 봄날이면 자운영! 제 몸을 꺾어 다디단 향기를 땅속 깊이 묻곤 했었지 육십령(六十嶺) :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을 잇는 고개. 육십현·육복치라고도 한다. 높이는 734m 예로부터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 이상의 무리를 지어서 고개를 넘어야 도둑떼를 피할 수 있다거나 재몬당까지 60여 굽이가 된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
-
박일만 - 늙은 마라토너의 기록시(詩)/박일만 2018. 6. 21. 22:51
출발도 도착도 아닌 지금은 철저히 혼자다 늘어가는 나잇살로 가능성을 점쳐 보지만 신기록은 요원하다 재기를 위해 목숨을 건 몸만들기 모자 눌러쓰고, 운동화 끈 동여매고 새벽에 출발, 이슥하여 돌아온다 온몸에 어둠을 칠하고 귀가하는 나이 막판까지 뛰어야 한다는 다짐만 늘어간다 한때의 영광은 묻혀진지 오래 팬들의 갈채도 이제는 기억조차 하얗다 어떻게든 맞바람을 깨고 기록갱신 해야 하는 몸은 점점 늘어지고 아득한 기록이 앞서가며 나를 따돌린다 달려본 사람만이 아는 저승같은 골인지점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좌우명에 땀 절은 짧은 팬츠로 왔다 단 몇 초의 기록 단축도 억겁과의 싸움이다 반환점을 돌아도 한참을 지나 온 저무는 길은 또 가파르고 아침부터 뛰어 여기에 당도했으나 변변한 기록하나 건진 게..
-
박일만 - 금연담론시(詩)/박일만 2018. 5. 9. 01:54
김 대리가 무너졌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작심 삼 개월 외로웠단다 지독히도 외로웠단다 머릿속 휑하고 가슴이 뻥 뚫린 듯 담뱃불로 불붙여주며, 마주 바라보며 웃음꽃 피우던 풍경이 그립더란다 어느 시대 논리로도 풀지 못 할 난제였는데 모순일까 싶어 되짚어 봐도 알 길 없어 김 대리는 다시 불 댕겼다는데 끊고 나면 세상이 달리 뵐 거라는 애당초 작심은 슬그머니 꼬리 감추고 무릎 꿇었다는데 금연은 외롭다 흡연도 외롭다는 세상 그래서 빨간 꽃웃음이나 구름도넛 만들어 위로하는 것이라는데 금연만이 살길이다 설파하던 김 대리 자꾸만 하얀 안도감을 뿜어댄다 머리도 흰 골초 김대리 (그림 : 송금석 화백)
-
박일만 - 정선장(場)시(詩)/박일만 2018. 5. 9. 01:29
군청에서 내준다는 자리 하나 꿰차지 못한 채 좌판을 벌려 놓아도 햇살만 기웃, 노파를 닮은 산나물 그릇들이 수척하다 잘 지냈소? 외지 장사꾼이 모여들며 인사를 건네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는 아라리 아라리로 흘러가는 산천만 낯빛이 깊다 쇳소리 목청들로 메워지는 장마당 사방에서 모여 팔방으로 흩어지는 바람같은 생들이 목을 빼고 닷새를 외친다 한 묶음 삼천 원, 둘에 오천 원! 어깨걸친 산맥들이 연대하여 세상을 불러 모으는 하루가 분주하게 저물어 간다 비끄러맨 구절초 꾸러미들 툭, 툭 햇살을 끊고 어느 사이 난장판이 휘청하자 뼈대만 남는 골목들 번잡한 소리와 몸짓들이 사라진 바닥엔 흙먼지만 난분분 난분분, 펄펄 끓다만 가마솥이 적막과 함께, 휴! 뒷 담화를 즐긴다 정선장 : 정선5일장(旌善五日場). 강원도 정..
-
박일만 - 등시(詩)/박일만 2016. 7. 24. 22:00
기대오는 온기가 넓다 인파에 쏠려 밀착돼 오는 편편한 뼈에서 피돌기가 살아난다 등도 맞대면 포옹보다 뜨겁다는 마주보며 찔러대는 삿대질보다 미쁘다는 이 어색한 풍경의 간격 치장으로 얼룩진 앞면보다야 뒷모습이 오히려 큰사람을 품고 있다 피를 잘 버무려 골고루 온기를 건네는 등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두 다리를 대신해 필사적으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사람과 사람의 등 비틀거리는 전철이 따뜻한 언덕을 만드는 낯설게 기대지만 의자보다 편안한 그대, 사람의 등 (그림 : 남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