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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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제라늄시(詩)/이규리 2022. 7. 22. 16:33
안에서는 밖을 생각하고 밖에서는 먼 곳을 더듬고 있으니 나는 당신을 모르는 게 맞습니다 비 맞으면서 아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어요 약속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물은 비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나 봐요 그런 은유라면 나는 당신을 몰랐다는 게 맞습니다 모르는 쪽으로 맘껏 가던 것들 밖이라는 원망 밖이라는 새소리 밖이라는 아집 밖이라는 강물 조금 먼저 당신을 놓아주었다면 덜 창피했을까요 비참의 자리에 대신 꽃을 둡니다 제라늄이 창가를 만들었다는 거 창가는 이유가 놓이는 곳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지키는 걸 약속이라 하지요 늦었지만 저녁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저녁에게 이르도록 하겠어요 여름, 비, 안개, 살 냄새 화분을 들이며 덧문을 닫는 시간에 잠시 당신을 생각합니다 흔들림도 이젠 꿈인데 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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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이후시(詩)/이규리 2020. 12. 31. 12:00
봄은 오는 게 아니야 가고 있는 거야 그러니 손목은 너무 세게 잡지 말고 갈 때 놓아주도록 살며시 살며시, 라는 말 울고 싶은 말이기도 한데 당신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빽빽한 숲에서도 한눈에 드는 나무가 있지 놓아준 나무 놓아준 손목 시끄러운 곳에서도 뒤돌아보게 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놓아준 것이야 그 소리 목소리도 가고 있는 거 원했던 건 가고 있는 거 가고 있는 건 고요가 되겠지 비유 너머에 있는 그것 너머라는 말도 울고 싶은 말이었는데 거기 알 수 없는 그늘이 있지 느릅나무 분재는 겨울에도 가득 초록 잎을 달고 놓아줄 때를 잊고서 오래 머무는 건 정말 무서웠는데 쓸쓸하게도 머무는 사이 우는 법을 알아갔을 것이다 나무가 풍경에서 나갈 수 있도록 손목이 약속에서 나갈 수 있도록 (그림 : 강정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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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모래시계시(詩)/이규리 2020. 8. 22. 15:23
뒤집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를 읽을 수 없어 뒤집어지지 않으면 노을은 수평선을 그을 수 없어 그리고 무덤은 이름들을 몰라 폭우가 유리지붕을 딛고 지나가면 장면들은 뒤집어지지 편견은 다시 뒤집어지지 간곡히 전심으로, 이런 건 더욱더 뒤집어지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밤이 많았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걸 열 번 더 해도 그냥 문을 열 수는 없었지 혁명은 문이 아니었지 설명을 길게 하고 온 날은 몸이 아팠다 애인들은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사하지 않아야 한다 뒤집어진 이후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두기로 한다 때가 되기도 전에 누군가는 성급히 몸을 뒤집었고 또 누군가는 습관처럼 그걸 다시 뒤집고 이후는 늘 무심하니까 모래가 입을 채우고 나면 조금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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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관광버스시(詩)/이규리 2019. 10. 5. 15:13
세 사람 건너면 내게 마이크가 올 차례다 단풍 진 바깥에 눈을 주고 있어도 귀는 노랫가락에 딸려간다 무량수전, 부석, 선묘, 닫집…… 이런 단어 몇 개 가랑잎처럼 따라오다 남행열차와 소양강에 휩쓸려가버린다 사뭇 교양적이다가도 돌아가는 길에서는 약속한 듯 모두 급해진다 금방 일치가 된다 생은 늘 뒤에서 덜미를 낚아채니 못 이긴 척 질펀하게 풀어야 할지 차창 밖 멀리 웅크린 산등성이 몇 번 넘고 싶었다 넘어야 할 이유는 많았다, 저 능선들 저녁밥 굶고 모로 누운 가족 등허리 같아 슬쩍 커튼을 가린다 다시 생의 마지막을 소진하듯 헐거운 나이가 허용하는 고성과 방가 외로웠구나, 궂었구나, 돌아보면 어여쁜 것들 천지에서 오늘 함께 젖어보는 거다 가로수 아래 흥건히 떨어지는 단풍잎들도 소진한 것 아니냐 중얼거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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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등시(詩)/이규리 2019. 10. 5. 15:10
등은 수식이야 등을 자주 보이는 사람 따라가지 마라지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있을 것 같았어요 반쯤이 공허라 해도 또 반쯤이 모호함이라 해도 우린 사실 그곳에 도착한 적이 있어요 언제까지나 늙지 않을 것처럼 뒤를 미루지만 달리 보여줄 게 없을 때 보게 될까 두려울 때 등이라도 내밀어야 했다는 것 무엇으로도 말 할 수 없는, 말해도 닿을 수 없는, 수식이라면 왜 뒤에 두었겠어요 다 알게 되더라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참도 있는 것 먼 불빛도 다가가보면 내 집이듯 등은 그런 먼 불빛 아닌지요 (그림 : 정종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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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보수동 헌책방 골목시(詩)/이규리 2019. 10. 5. 15:04
헌책방 골목에 들어서면 말린 시래기 냄새가 난다 허드레지만 쓸 만해서 버린 과거를 주워 누군가 차곡차곡 난전을 펴놓은 곳 밀려난 전처들 모습이 조금은 기품을 자랑하고 있다 양은 다라이에 삥 둘려놓은 순대 속 같은 길, 보수가 필요 없는 길 시름시름 닳은 사람 냄새 배이고 배여 손때 묻은 이건 몇 순배나 돌았는지 책이 사람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는데 간혹 이마를 수그리고 골목으로 들어서는 몇몇 사람 눈과 손이 동시에 더듬어 뽑는 것, 재혼처럼, 얼마쯤은 담보한 새로움이거나 덤으로 얻은 기쁨이거나 간에 기죽지 않아서 좋고 또 쬐끔은 지적이어서 좋고 그런 다음, 식은 순대 하나 입에 넣은 적 없는데 내 창자가 훈훈해 오는지 괜히 표정이 넓어지는지 이 골목이 내장이 일순 위로 가는 계단만 같아서 보수동책방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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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하얀새시(詩)/이규리 2019. 7. 26. 10:17
1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만나는 일도 헤어지는 일 우리 서로 모르는 일 날아가는 새는 가는 곳을 말하지 않는다 2 올라가는 길엔 새의 울음 내려오는 길엔 잎사귀의 죽음 자꾸 집을 비우는 마음아 따라올 수도 없는 늦은 이별아 발은 날아가 버리고 빈 구두만 남아 슬픔은 끄트머리부터 말라갔다 3 날갯죽지 안에 남아 있던 체온은 둥지에 놓고 새는 비로소 한 경계를 벗는다 우리가 그토록 머금었던 꿈도 부리가 찍은 흔적 떠나가는 꽃들은 무게를 다 버리고 젖은 날개를 털자 당신은 물기도 없이 흩어졌다 (그림 : 김명숙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