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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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해마다 꽃무릇시(詩)/이규리 2015. 5. 30. 19:36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생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그림 : 문명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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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커다란 창시(詩)/이규리 2015. 5. 30. 19:34
창이 큰 집에 살면서 되려 창을 가리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야 창이 건물의 꽃이라지만 나는 누추하여 나를 넓히는 대신 창을 줄이기로 한다 간절히 닿고 싶었던 건 어둠이었을까 모순의 창 제 안에 하루에도 여러 번 저를 닫아거는 명암이 있어 어느 날은 그 창으로 꽃을 보았다 말하겠지 어느 날은 그 창으로 비참을 보았다 말하겠지 우리가 보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인데, 왜 창 앞에 자주 저를 세웠을까 돌아보면 거기 누군가의 눈이 있었다고 말해도 될까 누군가는 나를 다 보았겠지만 해부한 개구리처럼 내 속을 다 보았겠지만 창이 왜 낮엔 밖을 보여주고 밤엔 자신을 보게 하는지 그리운 것들은 다 죽었는데 누가 이렇게 커다란 창을 냈을까 (그림 : 신제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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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시(詩)/이규리 2015. 5. 30. 19:31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그림 : 김준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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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시(詩)/이규리 2014. 2. 21. 12:00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이 되는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처럼 순간이 순간을 불러 순간에 복무하는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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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희망이란 것시(詩)/이규리 2013. 12. 10. 12:33
부레옥잠은 팔뚝에 공기주머니 하나 차고 있다 탁한 물에서도 살 수 있는 건 공기주머니 속에 든 희망 때문이다 가볍게 떠 있던 물 속 시간들 희망이 꼭 미래를 뜻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팔뚝에 희망 하나 차고 다닌 적 있다 잊을 수 없는 일마저, 건널 수 없는 세상마저 그 속에 밀어넣었던 적 있다 그런 희망이 텅 빈 주머니란 걸 언제라도 터뜨려 질 수 있는 눈물이란 걸 나는 몰랐을까 부레옥잠이 떠 있는 건 희망 때문이 아니다 속을 다 비워낸 가벼움 때문이 아니다 잎잎마다 앉은 한 채씩의 승가람 그 자리는 서늘해서 누구나 바람 소릴 노래처럼 안고 가는데 옥잠이란 이름에 부레 하나 더 얹은 쓸쓸한 감투가 그의 이름이듯이 (그림 : 허정금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