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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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계급의 발전시(詩)/류근 2023. 7. 11. 20:27
술이 있을 때 견디지 못하고 잽싸게 마시는 놈들은 평민이다 잽싸게 취해서 기어코 속내를 들켜버리는 놈들은 천민이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술 한 잔을 다 비워내지 않는 놈들은 지극히 상전이거나 노예다 맘 놓고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놈들은 권력자다 한 놈은 반드시 사회를 보고 한두 놈은 반드시 연설을 하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잡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잰다 한두 놈은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슬슬 곁눈질로 겉돌다가 마침내 하필이면 천민과 시비를 붙는 일로 권력자의 눈 밖에 나는 비극을 초래한다 어디에나 부적응자는 있는 법이다 한두 놈은 군림하려 한다 술이 그에게 맹견 같은 용기를 부여했으니 말할 때마다 컹컹, 짖는 소리가 난다 끝까지 앉아 있는 놈들은 평민이다 누워 있거나 멀찍이 서성거리는 놈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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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고달픈 이데올로기시(詩)/류근 2022. 8. 29. 15:24
오늘은 오래 걸었습니다 머리가 걷기를 원했으므로 머리를 가지지 못한 다리는 따라 걸어야 했지요 처음부터 다리가 걷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머리가 가자는 대로 가다가 더 이상은 걸을 수 없다고 머리가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다리는 그래서 걷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구부린 채 머리의 다음 생각을 기다렸습니다 다리는 머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꿈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아플 때 제 아픔을 아파하고 제가 더러워졌을 때 제 더러움을 더러워 할 뿐이지요 머리가 아플 때 제 다리가 아프지 않고 머리가 세상의 일로 더러워졌을 때 제 다리 하나도 더럽지 않습니다 머리가 없어므로 다리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프면 머리가 먼저 그 아픔 때문에 아프고 가 더러워지면 머리가 먼저 제 더러움에 소스라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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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가을이 왔다시(詩)/류근 2022. 8. 29. 15:14
가을이 왔다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왔다 하루는 내가 지붕 위에서 아직 붉게 달아오른 대못을 박고 있을 때 길 건너 은행나무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몇 잎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길에 오르고 아직 바람에 들지 못한 열매들은 지구에 집중된 중력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주의 가을이 지상에 다 모였으므로 내 흩어진 잔뼈들도 홀연 귀가를 생각했을까 문을 열고 저녁을 바라보면 갑자기 불안해져서 어느 등불 아래로든 호명되고 싶었다 이마가 붉어진 여자를 한번 바라보고 어떤 언어도 베풀지 않는 것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뜻 안경을 벗고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는 일이 그런대로 스스로에게 납득이 된다는 뜻 나는 식탁에서 검은 옛날의 소설을 다 읽고 또 옛날의 사람을 생각하고 오늘의 불안과 미래로 가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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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술 마시는 행위시(詩)/류근 2022. 3. 17. 22:10
술김에 사표를 던지고 두어 달 술로 시간을 헹구다 보니까 술 마시는 행위가 점점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술 마시는 행위가 부끄러워져서 결국 혼자 숨어 술 마시게 되면 백발백중 알콜 중독이다 당신은 과거 6개월간 술 마시고 2회 이상 필름이 끊긴 적이 있습니까? 혼자 있을 때 술 생각이 납니까? 술로 인해 인간관계 또는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술을 마시게 됩니까? 술에서 깨고 나면 죄책감에 시달립니까? 등등 여성지에 실린 문항에 동그라미를 그리다 보면 현재 나의 상태는 의사와의 면담 단계를 지나 긴급 격리수용 대상자에 해당된다 가상하다 여성지 빈칸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숙취의 사내여 그 친절한 처방을 알기 전부터 술를 빌려 스스로 세상과의 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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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 상처적 체질시(詩)/류근 2021. 2. 5. 08:18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