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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근 - 가을이 왔다
    시(詩)/류근 2022. 8. 29. 15:14

     

    가을이 왔다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왔다

     

    하루는 내가 지붕 위에서
    아직 붉게 달아오른 대못을 박고 있을 때
    길 건너 은행나무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몇 잎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길에 오르고
    아직 바람에 들지 못한 열매들은
    지구에 집중된 중력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주의 가을이 지상에 다 모였으므로
    내 흩어진 잔뼈들도 홀연 귀가를 생각했을까
    문을 열고 저녁을 바라보면 갑자기 불안해져서
    어느 등불 아래로든 호명되고 싶었다
    이마가 붉어진 여자를 한번 바라보고
    어떤 언어도 베풀지 않는 것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뜻
    안경을 벗고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는 일이
    그런대로 스스로에게 납득이 된다는 뜻
    나는 식탁에서 검은 옛날의 소설을 다 읽고
    또 옛날의 사람을 생각하고
    오늘의 불안과
    미래로 가는 단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가을이 내게서 데려갈 것들을 생각한다
    가을이 왔다 처음 담을 넘은 심장처럼
    덜컹거리며 빠르게,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망설임으로
    왔다

    (그림 : 서정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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