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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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다저녁때 내리는 눈시(詩)/이상국 2023. 1. 30. 06:13
다저녁때 눈 온다 마을의 개들이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눈 오는 날 피나무로 두리반을 만들거나 손바닥에 침을 뱉어가며 멍석을 맸다 술심부름 갔다 오는 아이처럼 겅충겅충 가로등 아래 눈 온다 주전자가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어느 해 겨울 그 멍석으로 기어코 당신의 문상객을 맞았다 눈은 아무것도 모르고 와 공평하게 마을의 지붕을 덮는다 불빛 화안한 창들 지저분한 나라도 좋아하겠다 눈은 천방지축 어둑한 골목길로 돌아다닌다 눈은 자기가 눈인 줄도 모르지만 눈에게도 고향이 있어서 거기 가서 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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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산속에서의 하룻밤시(詩)/이상국 2022. 12. 17. 07:46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그만 문을 닫는다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어디선가 작은 버러지들 끝없이 바스락거리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새들은 몇번씩 꿈을 고쳐 꾼다 커다란 어둠의 이불로 봉우리들을 덮어주고 숲에 들어가 쉬는 산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저 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저항령 어둠속에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별을 쳐다본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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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먼 배후시(詩)/이상국 2020. 11. 6. 18:31
좋아하는 계집아이네 집 편지통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던져놓고 멀리서 지켜보던 때가 있었다 나는 카드를 따라 그애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해가 져도 그애는 나타나지 않았고 오랫동안 밖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언젠가 그애가 멀리 시집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자애들은 그렇게 시집을 갔다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났고 또 나는 그애의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았지만 사철나무 울타리에 몸을 감추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소년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리다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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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아버지가 보고 싶다시(詩)/이상국 2020. 11. 6. 18:18
어떤 날은 자다 깨면 소 같은 어둠이 내려다보기도 하는데 나는 잠든 아이들 얼굴에 볼을 비벼보다가 공연히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지금은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들에서 돌아오는 당신의 옷이나 모자를 받아들면 거기서 나던 땀내음 같은 것 그게 생의 냄새였을까 나는 농토가 없다 고작 생각을 내다 팔거나 소작의 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는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저 들과 들의 바람까지 걱정하며 살았는데 나는 밤나무 한 그루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그런 날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림 : 이원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