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수우
-
김수우 - 종점 다방시(詩)/김수우 2022. 2. 17. 10:01
한 모퉁이에서 화초가 말라 가고 또 한쪽에는 프라스틱 꽃나무 무성하다 날마다 틀어놓은 때묻은 노래로 비어 가는 생의 앞뜰 천식환자로 늙어 버린 시계가 가르릉가르릉 흠집 많은 하루를 밀고 가는데 문득, 창 밖은 목련이다 불시에 달려온 듯, 숨찬 그리움, 한순간 바람 안고 뚝뚝 떨어진다 놀라워라 땅에 내려앉는 법 치열해라 미련을 버리는 힘 그 옆에서 나는 앞발가락을 편 채 나자빠졌던 시장통 구석의 생쥐 죽음과 난 상관없음을, 아무 관계도 아님을 중얼거린다 노래에 열중한다 심심하다 지친 비너스 석고상 뒤로 목련이 지는 변두리다방 여기저기 긁힌 탁자 위에서 내 모든, 모든 추억은 고요하다 (그림 : 설종보 화백)
-
김수우 - 근대화슈퍼시(詩)/김수우 2022. 1. 15. 12:44
천마산 밑 초장동 '근대화슈퍼'가 부산항을 펄치고 있다 근대화, 슈퍼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1950년대 점방 그대로다 소주도 팔고 담배도 팔고 감귤도 판다 식용유, 비누, 북어와 번개탄이 거미줄을 치고 기다린다 가난은 이끼 많은 바위처럼 고집 센 가축 희망과 예언은 근대화될 수 없다 거기서 팔리는 것들은 언제나 초월 피란의 역사를 기르는 산동네 늙은 몸집마다 홍역처럼 아직도 부적(符籍)이 피어난다 슬픔은 화석이 되지 않는 것 처럼 그림자는 숨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천마산도 동백꽃도 근대화되긴 글러먹었다 과자 든 네살배기 팔랑팔랑 나비가 되고 막걸리를 사 든 팔순 노인 꾸물구물 애벌레가 된다 때 묻은 차양 위에서 미끄러지는 저녁 햇빛의 발 고장난 계량기를 딛고 아득바득 벼랑에 매달린 근대화슈퍼, 형광등을 켠..
-
김수우 - 아버지, 당신은시(詩)/김수우 2019. 12. 25. 12:45
참, 참, 오래된 집입니다 나팔꽃이 피고 지며 바람이 들며나며 지은 집 쪽창을 밀고 들어온 저녁이 사진틀과 옷가지를 청보라로 물들이던 집 삶이 가진 불안과 희망이 기와가 되고 문지방이 되고 죽음이 주는 설움과 평화가 만든 마루와 벽장 속에는 알맞게 삭은 어질병이 살아갑니다 한때 바삭거리던, 이젠 눅눅한 그리움이 하나하나 벽돌이 된 그 집에서 젖었다 마르곤 하는 나와 나의 사람들과 내 추억의 몸들 녹슨 못들로 총총한 당신은 깨꽃과 산능선과도 잘 어울려 어떤 세상이라도 고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 채 옴팡집으로 적막한 당신 옆구리에 무당거미 한 마리 거미줄 치며 햇살을 고릅니다 (그림 : 박락선 화백)
-
김수우 - 저, 낙타시(詩)/김수우 2019. 11. 24. 00:01
내내 마른 목젖으로 신기루를 걸어 닿고 싶은 데 어디일까 저 낙타는 보지 못한 초원을 그리워하는 법이 아니라고 제 마음에 미리 말해 두었는지 빈 하늘 첩첩 껴안고 넘는 모래 언덕 그 몸 안에 침묵의 사원을 지었다 사원의 뒤뜰에서 발효되고 있는 이름 어떤 바람으로 피어나려는 걸까 멀리 사람들이 서성인다 평생을 걸어도 마지막 무릎을 꿇을 곳, 결국 사막 한가운데임을 되뇌는 걸까 자유란 모랫길만큼 지루한 지평이라고 제 마음에 미리 말해 두었는지 그 몸밖에 잿빛 봉우리 하나 일어선다 콧잔등에 묻은 노을을 긴 속눈썹으로 걷어올리는 저 낙타 눈망울에 잠긴 저녁하늘이 깊다 곧 별이, 풀 씨 같은 별이 뜨리라
-
김수우 - 낙타는 제 걸음을 세지 않는다시(詩)/김수우 2019. 11. 23. 23:56
한 발짝을 마지막 발짝처럼 짚어 수천 킬로 황야를 건넌다 지독한 단조로움을 딛는 발굽은 늘 죽은 낙타를 밟고 있다 모래파도 일렁일렁 약속을 지워버려도 에미가 풀어간 새벽, 애비가 일구던 수만 리 무장무장 다져야함을 알아 발자국 많은 적막 끝내 가시꽃송이로 피우고 만다 가시꽃이 뜨거운 먼지와 매일 싸울 수 있는 건 잠잠히 낙타를 기다리기 때문 사하라는 속도를 믿지 않는다 저 무진장 침묵이 감춘 물길을 찾기 위해 무릎을 높이 세우되 눈은 낮게 떠야 한다,는 입속말로 입속말로 자란 낙타 가슴근육이 팽팽하다
-
김수우 - 매화(梅花)를 지나다시(詩)/김수우 2019. 1. 22. 14:48
돌아오는 걸음인가요 떠나는 걸음 걸음인가요 봄눈 갸웃대는 매화나무를 떠나면서 돌아오는 중이라고 말씀하네요 멈추고 흐르는, 한 굽이를 봄눈도 매화도 이미 아는 양 환하니 손을 잡는 일, 손을 놓는 일, 한 켤레 신발이었네요 낯설고 익숙한 머무름이네요 다만 그 경계(境界), 내내 지축이 울리고 있었네요 늙은 빗돌 들고양이 눈빛을 하고 어정대는데 빵을 굽거나 경전을 읽거나 바위도 구름도 바위 같은 신화도 기름 같은 농담도 한 그늘 속 제자리였네요 아름다운 기차로 달리는 당신과 푸른 간이역으로 서 있는 내가 한 켤레 사랑이네요 한 잎 봄눈인 당신이 한 잎 봄눈인 나에게 피우는 저 꽃, 쿵! 쿵! 먼 지붕이 흔들리는데 당신의 단추는 거기서 망울로 부풀고 나의 소매는 여기서 꽃부리고 반짝이고 (그림 : 조광기 화백)
-
김수우 - 우리 몸속에 마을이시(詩)/김수우 2018. 5. 15. 09:59
…처음엔 집 한 채였다 길이 생기고, 길목에 다시 한 채의 집 송장메뚜기가 살았다, 길이 나고 집 한 채 말없는 이모와 우산풀이 살았다 길이 나고 집 한 채, 집집마다 창이 나고 창문마다 무명 실타래 같은 길이 났다 그때부터 솔방울 하나도 집이 되었다 솔잎 하나가 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내 몸속에도 이제, 마을이 생기려는가 배추밭 푸르고 징검돌 놓이고 장날이 서려는가 어느 날 소나무 숲 천천히 걸어 나오려는가 서로 기대야만 겨울강 흐르고 함께 마주 보아야 봄눈 내린다며 몸 안의 하늘, 전깃줄을 타고 흔들리는데 창마다 불빛이 들어온다 내 몸속에도 이제, 마을이 생기려는가 (그림 : 이금파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