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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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어른의 꿈시(詩)/이정록 2022. 10. 18. 06:57
내가 열살이 되었을 때 시소와 그네는 마지막인 줄 알았죠 어린이 놀이터는 끝인 줄 알았죠 어른이 된 뒤, 깊은 밤 쓸쓸히 그네에 앉아 있곤 하죠 홀로 삼켜야 할 걱정이 많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새벽에 홀로 시소에 앉아 있곤 하죠 저 아래 낭떠러지로 미끄러진 나를 어떻게든 끌어 올려야 하거든요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색종이와 인형은 마지막인 줄 알았죠 문방구 앞 오락기는 끝인 줄 알았죠 어른이 된 뒤, 깊은 밤 쓸쓸히 인형을 안아볼 때 많죠 함께 등을 토닥였으면, 토닥였으면 나이가 들수록 새벽에 담뱃갑 뜯어 학을 접곤 하죠 하늘 높이 날아가버린 꿈을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야 하거든요 슬픔도 걱정도 무지개 너머로 아픔도 한숨도 별빛보다 멀리 나는 언제나 여럿이 홀로 무지개처럼 나는 언제나 여럿이 함께 별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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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호박고지시(詩)/이정록 2022. 7. 5. 16:32
호박벌이나 호랑나비의 크기를 생각하면 호박꽃이 너무 커다랗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애호박 일곱 개에 늙은 호박 두 개뿐이라고 생각하면 호박덩굴이 참 기다랗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울타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호박고지를 생각하면 호박꽃은 더 크게 웃어도 되고 호박덩굴은 아랫마을까지 열 바퀴쯤 돌고 돌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박전, 호박찜, 호박김치, 호박범벅 호박죽, 호박엿, 호박지짐이, 호박오가리, 청둥호박나물, 호박 된장찌개를 다 늘어놓고 호박 음악대를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늙은 호박 속에서 겨우내 호박 등 밝히고 만화책이나 읽으며 호박씨나 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 : 이재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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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호박 (아버지 학교 12)시(詩)/이정록 2021. 1. 10. 14:24
식솔을 위해서라면 호박씨처럼 똥구덩이에 몸 담그는, 나는야 커다란 황금빛 호박꽃이다. 새끼들 으스대라고 모양만은 왕별 호박꽃, 독침도 없이 붕붕 소리만 요란한 호박벌이다. 어느새 너희 머리통은 야자수 열매처럼 단단해져 늙은 호박처럼 텅 빈 아버지를 수군거린다만 끝내는 호박고지, 황금빛 목걸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한겨울 살구나무는 붉은 우듬지를 올려다본다. 넌출거리는 마른 호박덩굴 쳐다본다. 아버지는 호박처럼 묵직한 걸 건네고 싶었다. 여린 잎에 호박순까지 끊어 바치는 게 좋았다. 허공을 짚고 오르는 덩굴손을 보여주고 싶었다. 똥구덩이에 빠져도 기죽지 마라. 겨우내 사랑방 윗목을 지키는 누런 호박의 가부좌를 보아라.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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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그렇고 그려시(詩)/이정록 2020. 7. 4. 15:32
육묘 판에 씨앗을 심고 잎이 나오길 기다려 봐. 떡잎이 가리키는 방향이 다 다르지. 그런데 이파리 무성해지고 키가 자라면 다 거기서 거기여. 꽃도 두엇일 때는 동서남북 고개 수그린 놈 쳐든 놈 제각 각이지만 무더기로 피면 그렇고 그려. 꼬투리도 열매도 당연히 모양이며 빛깔이 다 다르지. 우리네 삶도 그렇고 그려.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하나둘일 때는 나만 부실하고 응달 얼음판이고 억울하지만 살다 보면 다들 걱정거리가 꾸러미로 두릅으로 바지게 짐짝으로 거기서 거기여. 굶어 죽은 놈보다 많 이 먹어서 병 걸리는 놈이 많다잖여. 올챙이 배처럼 창자가 복잡해도 똥구멍은 단순한 거여. 추워지면 죄다 땅속으로 겨울잠 자러 가는 거여. 슬픔도 괴로움도 다 무더기로 피는 꽃이여. 우리는 거름 치지 않은 꽃밭이고 참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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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노란 주전자시(詩)/이정록 2020. 7. 4. 15:22
마음은 노란 주전자 같아. 황금을 꿈꾸지만 빛깔뿐이지. 게다가 뚜껑이 자주 열리고 동굴처럼 시끄럽기 일쑤지. 끓기도 전에 들썩거리고 잔바람에도 나뒹굴 때가 많지. 뚜껑에 끈을 달아야겠어. 가슴과 머리가 짝이 안 맞아. 가벼운 충격에도 안으로 쭈그러지니까 자꾸만 속이 좁아져. 상처를 닦고 지우려해도 달무 리처럼 사라지지 않아. 벽에 걸린 주전자처럼 둥근달이 되고 싶어. 시든 꽃나무나 목마른 목젖에 달빛을 따라주고 싶어. 맞아. 주전자는 성선설 쪽이야. 후딱 달아오르고 쉬이 식는 게 흠이지만, 맹물이나 모래 라도 채우고 나면 바닥에 착 가라앉는 느낌이 좋아. 온몸에 차가운 물방울이 잡힐 때는 이지적이란 생각 도 들어. 마른 화단이나 파인 운동장에 몸을 기울일 때 가장 뿌듯해. 다 내어주어서 어둡고 서늘해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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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감정의 평균시(詩)/이정록 2020. 7. 2. 18:09
부푸는 무지개를 슬그머니 끌어내리고 뚝 떨어지는 마음의 빙점에는 손난로를 선물할 것 감정의 평균에 중심 추를 매달 것 꽃잎처럼 달아오른 가슴 밑바닥에서 그 어떤 소리도 올라오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쉴 것 불에 달궈진 쇠가 아니라 햇살에 따스해진 툇마루의 온기로 손끝만 내밀 것 일찍 뜬 별 하나에 눈을 맞추고 은하수가 흘러간 쪽으로 고개 들고 걸어갈 것 먼저 이별을 준비할 것 땡감처럼 바닥을 치지 말고 상처 없이 감꽃처럼 내려앉을 것 감꽃 목걸이처럼 감정의 중심에 실을 꿸 것 시나브로 검게 잊혀질 것 (그림 : 이효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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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봄바람시(詩)/이정록 2019. 1. 14. 20:56
식은 재 한 삼태기, 불 아궁이를 지나왔나요. 오늘은 호박 심는 날 봄바람이 따뜻하네요. 똥 웅덩이에 코를 대보고 거름 웅덩이에 손을 넣어보네요. 호박 모종 심을 웅덩이는 알맞는 깊이와 넓이 인지 물은 충분히 스몄는지 실눈 뜨고 살펴본 봄바람이 내 귓볼에 대고 속삭이네요. 장마에 물웅덩이에 빠지지 말고 술 취해 똥구덩이에 빠지지 마세요. 가을걷이에 빚더미에 빠지지 말고 아흔 살 전에는 절대로 무던 웅덩이에 빠지지 말아요. 귀엽게 호박씨를 까네요. 볼우물 씰룩댈 때마다 거름 냄새가 피어나네요. 오늘은 호박 심는 날 두근두근 봄바람이 나네요. (그림 : 신재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