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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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해 지는 쪽으로시(詩)/이정록 2017. 7. 1. 19:31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 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 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 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 나는 꼭,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벗 그림자로 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 속눈썹이 젖어있네. 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이 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 그늘 막대가 가르키는 쪽을 나도 매일 바라본다네 해마다 나는 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 (그림 : 이나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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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청양행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시(詩)/이정록 2017. 7. 1. 19:17
-이게 마지막 버스지? -한대 더 남았슈. -손님도 없는데 뭣하러 증차는 했댜? -다들 마지막 버스만 기다리잖유. -무슨 말이랴? 효도관광버슨가? -막버스 있잖아유. 영구버스라고 -그려. 자네가 먼저 타보고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줘. 아예 그 버스를 영구적으로 끌든지. -아이고 지가 졌슈. -화투판이든 윷판이든 지면 죽었다고 하는 겨. 자네가 먼저 죽어. -알았슈. 지가 영구버스도 몰게유. 볼래 지가 호랑이띠가 아니라 사자띠유. -사자띠도 있남? -저승사자 말이유. -싱겁긴. 그나저나 두 팔 다 같은 날 태어났는 데 왜 자꾸 왼팔만 저리댜? -왼팔에 부처를 모신 거쥬. -뭔 말이랴? -저리다면서유? 이제 절도 한채 모셨고만유. 다음엔 승복 입고 올게유. -예쁘게 하고 와. 자네가 내 마지막 남자니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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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까치내시(詩)/이정록 2017. 7. 1. 19:11
개가죽나무 두 그루 서른 살이 넘었네 동쪽 개가죽이 아침햇살 받아 그늘을 건네고 서쪽 개가죽이 저녁노을 받아 어스름 건네네 지난여름엔 마을로 쳐들어오는 태풍 들이받고는 동쪽이 서쪽에게 몸을 맡겼네, 잔바람에도 온몸이 울음통 되어 삐걱거리는 개가죽 시끄러워 죽겠으니 베어버리자고, 어르신들 마을회관에서 헛기침을 내려놓던 며칠 까치 한 쌍이 개가죽의 신음에다 부목을 잇댔네 알도 한 꾸러미나 낳았네, 호들갑스런 사랑 노래에 새끼 까치들도 화음을 맞췄네 사람인 자(人字) 한번 진하게 써놨구먼 삐걱대던 소리가 먹 가는 소리였네그려 까치집이 나중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넘어지면서도 까치집은 잘 간수했다고 개가죽이 참가죽으로 성불했다고 올려다보네 거참 신통허네, 어느 쪽이 버팀목인 거여 충청남도 청양 대치면 지천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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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모시떡시(詩)/이정록 2017. 7. 1. 19:02
이끼가 핀 오래된 고백 같다 요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맛에도 생의 각오란 게 있다 혀인지 떡인지, 붙고 미끄러지기가 어느새 짝사랑은 아니구나 달빛 침묵과 햇귀의 망설임 허락된 사랑처럼 입안 가득 꿈틀댄다 모년 모월 모시, 늦은 결혼식만 남았구나 입술과 혀와 목젖이 할 수 있는 모든 연애의 방식으로 모시떡이 왔다 당신의 반달 손자국, 초록 실타래로 왔다 모시떡 : 전라남도 영암군에서는 유두나 추석에 데친 모시 잎과 불린 쌀을 곱게 갈아 소금 간을 해 인절미나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모시 잎의 독특한 향과 텁텁한 맛이 특이하며, 모시 잎의 생즙 덕분에 떡이 쉽게 굳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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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간장게장시(詩)/이정록 2017. 6. 2. 10:00
별명은 밥도둑이다. 등딱지는 열 번 넘게 주조(鑄造)한 이각반합(二角飯盒)이다. 밥 한 그릇 뚝딱! 게 눈 감추듯 치워버리는, 이 신비한 밥그릇을 지키려 집게손을 키워왔다. 손이 단단하면 이력은 두툼하다.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역사다. 양상군자(梁上君子)와 더불어 반상군자(飯上君子)로 동서고금의 도둑 중에 이대 성현이 되었다. 바다 밑바닥을 벼루 삼으니 먹물마저 감미롭다. 음주고행으로 보행법까지 따르는 자들이 발가락까지 쪽쪽 빨며 찬양하는 바다, 내 등딱지를 통해 철통밥그릇을 배워라. 밥그릇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큰 그릇이 되려면 지금의 그릇은 버려라. 묵은 밥그릇마저 잘게 부숴 먹어라. 언제든 최선을 다해 게거품을 물어라. 옆걸음과 뒷걸음질이 진보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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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 누군가 울면서 너를 바라볼 때시(詩)/이정록 2017. 2. 27. 23:19
걸음을 멈춰라. 무릎을 짚고 낮게 네 발로 서라. 울음은 힘이 세서 너를 쓰러뜨릴 수도 있단다. 마음의 귀를 부풀려서 또렷한 문장으로 울음을 번역해라. 뚝! 울음을 멈추라고, 다그치지 마라. 네 맘 다 안다고, 거짓 손수건을 내밀지 마라. 먹장구름으로는 작은 강줄기도 막을 수 없단다. 바다에 닿은 강 언덕처럼, 단단한 무릎으로 파도를 맞이하라. 그까짓 아픔도 참지 못하냐고, 내몰지 마라. 쫓겨난 눈물은 눈엣가시로 덤불을 이루리라. 불쌍한 것! 혀를 차며 떡부터 건네지 마라. 울음의 숨구멍이 메면 돌심장이 된다. 누군가 울면서 너를 바라볼 때, 네가 그 울음의 주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라. 울음은 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자에게 건너온 덩굴손이다. 울음에 갇힌 커다란 말이 네 눈으로 옮겨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