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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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탁주 반 되시(詩)/박성우 2020. 9. 14. 16:53
상가(喪家)에서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어색하고 무거웠던 그 자리가 어둠에 조금씩 밀려갈 무렵 나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옛날 얘기들을 몇 개 꺼냈다 고향마을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셨던 어머니 얘기 그때 만들었다는 외상장부 얘기 내가 40년도 더 된 그 장부를 아직 갖고 있다는 얘기까지…… 그날 우리는 그 장부가 있다 없다로 큰 내기를 하나 했다 나는 잊고 지냈던 그 장부를 밤새 찾았다 장부는 몇 번의 이사에도 어디 가지 않고 책장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설 선생 진로 1병 지동댁 연탄 숯 1봉 옥산댁 달걀 5개 아무 생각 없이 장부를 읽어 내려가다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 낯익은 이름 옆에 친구의 이름과 탁주 반 되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건 어린 친구가 아버지를 위하여 탁주 심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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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감자 캐기시(詩)/박성우 2020. 2. 5. 13:25
꿩알이 놓여 있던 주위는 씨알이 좋아도 감자를 캐지 않았다 새참 시간이다 한바탕 감자를 캐던 어머니들이 호미를 놓고 둥그렇게 모여 앉는다 포장하던 아버지들도 저울질 멈춘다 양동이에 미지근한 막걸리 붓고 박카스 다섯 병도 부어 휘휘 젓는다 멀리서 보면 감자 한 무더기로 보일 어머니들과 아버지들, 막걸리로 허기진 배 채운다 연거푸 받은 술에 취기가 올라온 나는 풀밭에 드러눕는다 슬슬 잠이 오는데, 어른들은 자리 털고 일어나 감자를 캔다 트럭에 감자 싣는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얼른 마무리하자 하신다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목구녕 안쪽으로 쏘옥 들어간다 하루 품삯으로 받은 햇감자 두 상자, 불룩하게 밀려나와 터질 것 같은 배를 테이프가 가까스로 누르고 있다 (그림 : 남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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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넥타이시(詩)/박성우 2019. 9. 26. 18:57
늘어지는 혀를 잘라 넥타이를 만들었다 사내는 초침처럼 초조하게 넥타이를 맸다 말은 삐뚤어지게 해도 넥 타이는 똑바로 매라, 사내는 와이셔츠 깃에 둘러맨 넥타이를 조였다 넥타이가 된 사내는 분침처럼 분주하게 출근을 했다 회의시간에 업무보고를 할 때도 경쟁업체를 물리치고 계약을 성사 시킬 때도 넥타이는 빛났다 넥타이는 제법 근사하게 빛나는 넥타이가 되어갔다 심지어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풀었을 때도 넥타이는 단연 빛 났다 넥타이는 점점 늘어졌다 넥타이는 어제보다 더 늘어져 막차를 타고 퇴근했다 그냥 말없이 살아 넌 늘어질 혀가 없어, 넥타이는 근엄한 표 정으로 차창에 비치는 낯빛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넥타이를 잡고 매달 리던 아이들은 넥타이처럼 반듯하게 자라주었다 귀가한 넥타이는 이제 한낱 넥타이에 불과하므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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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우리마을 일소시(詩)/박성우 2019. 9. 26. 18:39
황순이 가고 황순이 왔다 늙다리 일소 황순이는 가고 힘센 새 일소 황순이가 왔다 일소는 겨우내 몸을 풀어놔야 봄에 비탈밭을 너끈히 갈 수 있다 오늘이 닷새째, 우리 마을 새 일소로 당당히 낙점된 이천십오년 삼월생 황순이가 가짜 쟁기를 달아 끌며 금수양반과 함께 밭갈이 연습을 한다 송아지는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다 큰 암소도 아닌 황순이, 일곱배나 새끼를 치고 물러난 늙다리 일소 황순이 대를 이어서 이 마을 비탈밭을 책임질 터이다 노고를 다한 일소는 대체로 팔지않는다 고요해질 때까지 함께하다가 고이 묻어준다 노닥노닥 끙끙, 새 일소 황순이가 마을길을 네바퀴째 돌아나온다 오늘까지는 바섯바퀴를 돌고 내일부터는 한바퀴를 더해 여섯바퀴를 채울 참이다 아먼, 절대 무리허먼 못써! 연습은 금순이가 했는데 몸살은 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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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뽕나무밭집시(詩)/박성우 2019. 9. 26. 18:23
산골 뽕나무밭집에 살았다 뽕나무밭머리 뽕나무를 베어내고 지은 집이다 어매아부지는 새끼 여섯을 그집에서 쳤다 어매는 뽕나무 등결같이 늙었고 아부지는 옛 뽕나무밭집 밤 마당에 오디처럼 떴다 뽕나무 밭머리 뽕나무를 베어내고 지은 흙집에서 살았다 엄니 아부지는 누애섶같은 그 뽕나무 밭집에서 아들 셋과 딸 셋을 쳣다 시름 시름 앓다 시들어 돌무덤으로 간 큰성을 빼고 난 이집의 다섯째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뽕나무밭집의 누애들이었다 산내 능다리 재너머 앞을봐도 뒤를봐도 또 옆을 봐도 산만 보이던 동네 뽕나무집 여섯누애들은 그 뽕잎같은 날들을 사갉 사갉 갈가 먹으며 그냥 저냥 잘 자랐다 갉아먹다 갉아먹다 갉가먹을게 없으면 엄니 아부지 속도 박박 갉아먹으며 자랐다 눈물도 갉아먹고 때론 지독한 빛도 나눠 갉아 먹었다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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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보리시(詩)/박성우 2019. 9. 26. 18:13
초등학교 삼학년이 되는 딸애가 앞으로는 용돈을 좀 달라 한다 얼마나? 으음 한 삼천원쯤. 한달에? 아니 일주일에! 월요일 아침이면 어깨 으쓱이며 아비 노릇 하는 재미 쏠쏠하다 딸, 이게 웬 보리야? 응, 보리긴 보린데 물만 주면 자라는 보리야 딸애는 용돈으로 투명 용기에 담긴 보리를 사서 베란다 쪽 창가에 둔다 이거 키워서 보리차도 하고 보리빵도 할 거야 내 말을 잘 들으면 아빠 맥주도 만들어줄게! 투명 용기에 담긴 보리를 세어보니 대충 오십여알이다 와, 싹이 제법 나네? 딸애가 물 주는 걸 깜빡할 때는 물을 줬고 볕이 좋을 때는 투명 용기를 베란다에 내놓았다 봄볕 받고 자란 보리는 어느덧 싹을 베어 보리된장국을 끓여 먹어도 좋을 만큼 자랐다 더 놓아두면 누렇게 타들어가 죽겠구나, 시골집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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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띠쟁이고모네 점방시(詩)/박성우 2019. 6. 8. 09:12
하례마을 어귀엔 가게가 있다네 한번도 간판을 내건 적은 없지만 누구나 띠쟁이고모네 점방이라 부른다네 날짜 넘긴 빵이 진열대를 부풀리는 동안 냉수 한잔에 목을 축인 띠쟁이고모가 호미를 들고 한들한들 걸어나가고 있네 진입로 양쪽에 욕심껏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잡풀에 눌려 몸살을 앓고 있을 터이네 바로 앞 정각엔 논에 논에 다녀온 노인들이 매미의 울음을 베고 낮잠에 빠져있네 처마 끝이 소나무에 받혀진 구멍가게 안에는 띠쟁이고모 손자가 또박또박 장부를 적고 있네 석주아자씨 이홉드리소주 한병 외상 누렇게 익은 호박 한덩이와 애호박 한덩이가 안방으로 들어와 오순도순 살아가는 점방 뒷간 지붕에 열린 조롱방에서 구린내나지 않듯 내력은 거칠어도 마음은 꽃밭을 가꾸는 정읍군 산내면 하례마을 입구엔 띠쟁이고모가 산다네 풀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