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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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풀잡기시(詩)/박성우 2014. 1. 6. 13:52
올해만큼은 풀을 잡아보겠다고 풀을 몬다 고추밭 파밭 가장자리로, 도라지밭 녹차밭 가장자리로 풀을 몬다 호미자루든 괭이자루든 낫자루든 잡히는 대로 들고 몬다 살살 살살살살 몰고 싹싹 싹싹싹싹 몬다 팔 다리 어깨 허리 무릎, 온몸이 쑤시게 틈날 때마다 몬다 봄부터 이짝저짝 몰리던 풀이 여름이 되면서, 되레 나를 몬다 풀을 잡기는커녕 되레 풀한테 몰린 나는 고추밭 파밭 도라지밭 녹차밭 뒷마당까지도 풀에게 깡그리 내주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낮잠이나 몬다 (그림 : 구병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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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자두나무 정류장시(詩)/박성우 2014. 1. 6. 13:45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그림 : 노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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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어떤 품앗이시(詩)/박성우 2014. 1. 6. 13:42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구년 뒤, 한천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 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 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구복리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열이 어매고 한천댁은 울 어매다 (그림 : 하삼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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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참깨 차비시(詩)/박성우 2014. 1. 6. 13:40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문 앞에 어정쩡 앉으신다 처음 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뵌 것 같기도 한, 족히 여든은 넘어 뵈는 얼굴이다 아침잠이 덜 깬 나는, 누구시지? 내가 무얼 잘못했나? 영문도 모른 채 뒷머리만 긁적긁적, 안으로 드시라 했다 할머니는 불쑥 발을 꺼내 보여주신다 흉터 들어앉은 복사뼈를 만지신다 그제야 생각난다, 언제였을까 할머니를 인근 면소재지 병원에 태워다드린 일. 시간버스 놓친 할머니만 동그마니 앉아 있던 정류장, 펄펄 끓는 물솥을 엎질러 된통 데었다던 푸념, 탁구공 같은 물집이 방울방울 잡혀 있던 작은 발, 생각난다 근처 칠보파출소에 들어가 할머니 진료가 끝나면 꼭 좀 모셔다드리라 했던 부탁, 할머니는 한 됫박이나 될 성싶은 참깨 한 봉지를 내 앞으로 민다 까마득 잊은 참깨 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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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이팝나무 우체국시(詩)/박성우 2014. 1. 6. 13:36
이팝나무 아래 우체국이 있다 빨강 우체통 세우고 우체국을 낸 건 나지만 이팝나무 우체국의 주인은 닭이다 부리를 쪼아 소인을 찍는 일이며 뙤똥뙤똥 편지 배달을 나가는 일이며 파닥파닥 한 소식 걷어오는 일이며 닭들은 종일 우체국 일로 분주하다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는 다섯이다 수탉 우체국장과 암탉 집배원 넷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열심이다 도라지밭길로 부추밭길로 녹차밭길로 흩어졌다가는 앞다투어 이팝나무 우체국으로 돌아온다 꽃에 취해 거드름 피우는 법 없고 눈비 치는 날조차 결근하는 일 없다 때론 밤샘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빨강 우체통에 앉아 꼬박 밤을 새우고 파닥 파다닥 이른 아침 우체국 문을 연다 게으른 내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일을 나가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늦은 답장을 쓰거나 말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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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취나물시(詩)/박성우 2014. 1. 6. 13:33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고사리와 취나물을 잔뜩 뜯어 오셨어요 머리엔 솔잎이 머리핀처럼 꽂혀 따라와 마루에서야 뽑아졌구요 어머니는 두릅이 죄다 쇠서 아깝다고 몇번이나 되풀이하며 무심히 떠난 아버지를 중얼거렸는지 몰라요 가족사진에 한참이나 감전되어 있던 어머니가 취나물을 다듬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웬일인지 연속극을 보지 않으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어머니는 아버지 냄새에 취해 있었던 건 아닌지 느그 아부지는....느그 아부지는..... 취나물은 다른 때보다 아주 천천히 다듬어졌어요 느그 아부지는 취나물을 별시랍게도 좋아혔는디, 어머니가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게 취나물은 뭣허러 뜯어와서 그려요, 그런 어머니가 미워서 나는 방을 나왔어요 사실은 나도 울 뻔했으니까요 그리고 다짐했어요 내일 아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