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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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동그라미시(詩)/박성우 2014. 2. 24. 23:35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동그라미가 된다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에 갇히고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을 가둔다 안데 갇히고 안을 가두는 발 빠른 동그라미가 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 빈 동그라미가 되고 속 없는 동그라미가 된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반경의 동그라미가 되고 그러나 가장 크지 않는 동그라미가 된다 시작선도 끝선도 없이 그려지는 동그라미,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가 잽싸게 들어가면 동그라미 밖의 동그라미는 나울나울 동그라미가 되고 동그라미 안의 동그라미도 나울, 동그라미가 된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웅덩이의 엉덩이에 둥글납작 엎드려 퍼지는 동그라미, 고인 빗물이 되어 사라진 수많은 동그라미 위에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키운다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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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물의 베개시(詩)/박성우 2014. 2. 16. 23:09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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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나흘 폭설시(詩)/박성우 2014. 2. 16. 23:08
폭설이다 버스는 나흘째 오지 않고 자두나무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 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하다 간혹 빈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는 발길도 점방에 담배 사러 나가던 발길도 이장선거 끝난 마을회관에 신발 한 켤레씩을 보탠다 무를 쳐 넣고 끓이는 닭국 냄새 가득한 방에는 벌써 윷판이 벌어졌고 이른 낮술도 한자리 차고앉았다 허나, 절절 끓는 마을회관방엔 먼 또래도 없어 잠깐 끼어보는 것조차 머쓱하고 어렵다 나는 젖은 털신을 탈탈 털어 신고 다시 빈집에 든다 아까 낸 눈길조차 금시 지워지는 마당, 동치미국물을 마시다 쓸고 치직거리는 라디오를 물리게 듣다가 쓴다 이따금 눈보라도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간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내던 싸리나무와 조릿대와 조무래기 뽕나무는 되레 눈썹머리까지 폭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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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해바라기시(詩)/박성우 2014. 2. 9. 12:00
담 아래 심은 해바라기 피었다 참 모질게도 딱, 등 돌려 옆집 마당보고 피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말동무하듯 잔소리하러 오는 혼자 사는 옆집 할아버지 웬일인지 조용해졌다 모종하고 거름내고 지주 세워주고는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 기다린 터에 야속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해바라기가 내려다보는 옆집 담을 넘겨다보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은 옆집 억지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등에 슬몃슬몃 손 포개면서, 우리 집 해바라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림 : 안모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