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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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소금벌레시(詩)/박성우 2015. 9. 19. 10:55
소금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있다 머리에 흰 털 수북한 벌레 한 마리가 염전 위를 기어간다 몸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연신 소금물을 일렁인다 소금이 모자랄 땐 제 눈물을 말려 먹는다는 소금벌레, 소금에 고분고분 숨을 죽인 채 짧은 다리 분주하게 움직여 흩어진 소금을 쉬지 않고 끌어 모은다 땀샘 밖으로 솟아오른 땀방울이 하얀 소금꽃 터트리며 마른다 소금밭이 아닌 길을 걸은 적 없다 일생동안 소금만 갉아먹다 생을 마감할 소금벌레 땡볕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흥얼흥얼, 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으는 비금도 대산염전의 늙은 소금벌레여자, 짠물에 절여진 세월이 쪼글쪼글하다 비금도(飛禽島) :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 소재지가 있는 섬 비금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깨끗한 바다와 아름다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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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어머니시(詩)/박성우 2015. 7. 7. 11:13
끈적끈적한 햇살이 어머니 등에 다닥다닥 붙어 물엿인 듯 땀을 고아내고 있었어요 막둥이닌 내가 다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 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 웬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 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뽑고 있었어요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 지탱시키려는 듯 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 날카로운 호밋날이 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 뭐허고 놀긴 이놈아, 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 (그림 : 안호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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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개구리밥시(詩)/박성우 2014. 10. 15. 00:03
헛짚은 날들이 나를 증명해 놓았네 개구리밥이 물 위에 뿌리를 내리듯 헛물켠 시간들이 나를 세월의 방죽 위에 뜨게 했네 발목 닿지 않을 것 같은 내일도 겹겹이 떠 있을 것이네 바둥거려도 집으로 가는 골목과 골목은 좁아만 갔네 짐 꾸려 떠나온 곳마다 헐거워진 세간 대신 방안 가득 채운 달이 목 메였네 순대 한 접시 털레털레 들고 퇴근하는 밤엔 시린 달이 차가운 방에 들어와 소주를 들이켰네 잠들지 못한 새벽엔 비탈진 계단에 주저앉아 별을 털었네 차차 좋아 질 거야, 밑도 끝도 없이 헛짚은 날들이 지금의 나를 증명해 놓았네 거짓말이고 싶었던 세월은 끝내 위증되지 않았네 천장 뚫고 내려와 아랫목 고집하는 물방울마냥 안전핀 없는 일상은 어디든 돌파구를 내고 싶었네 아무 곳이나 뿌리 내려 자지러지고 싶었네 헛물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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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봄날 가고 봄날 온다시(詩)/박성우 2014. 9. 27. 13:10
이장님 댁 애먼 사과나무 묘목을 깡그리 뜯어먹어 사과나무 꼬챙이로 만들어놓던 염소 깜순이, 좁은 흙길 풀 뜯어먹어 우리집으로 드는 흙길을 음메헤에 음메헤에 넓혀주던 깜순이, 뽕잎가지 감잎가지를 꺾어내면 검은 눈 끔뻑끔뻑 짧은 꼬리 툭툭 다가오던 깜순이, 겨우내 철골 개막에서 마른 콩대와 콩깍지로 버티더니 봄 강변 매실나무 밑에 들어 첫 새끼를 놓는다 혼자 까막까막 산통을 앓고 혼자 까막까막 새끼를 받고 혼자 까막까막 핥아 세워, 봄 강변 매실나무 연분홍 꽃잎이 어메에 어메헤에 어메애 흩날린다 (그림 : 김인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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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비닐하우스시(詩)/박성우 2014. 8. 31. 23:08
시골집 수돗가 옆에는 비닐하우스가 있다 설 쇠러 시골집에 내려온 나는 문이 비스듬히 열린 비닐하우스에 들어 돼지감자 볶아 끓인 물을 마신다 손바닥 밭이 되기도 하고 곳간이나 방이 되기도 하는 이 비닐하우스는 낮에는 노모와 참새가 쓰고 밤에는 고양이가 쓴다 지난 늦가을에는 집 나온 동네 오리 서너 마리가 비닐하우스 안을 조져놓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작은 비닐하우스 안에는 노모가 소일할 때 깔고 앉는 방석이 놓여 있고 참새를 위한 왕겨와 깻대 묶음이 쌓여 있다 낮에도 개지 않는 헌 이불은 골목 고양이의 것이다 천장 아래쪽에 걸쳐진 장대에는 지푸라기로 묶은 메주가 익어간다 소쿠리에 담긴 씨 옥수수는 이가 야무지고 가장자리에 심어진 쪽파와 대파는 줄기가 튼실하다 노모가 앉는 방석에 앉아 볕을 쬐다 보니 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