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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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 엄마가 들어 있다시(詩)/이수익 2020. 10. 29. 18:13
보자기 속엔 엄마가 들어 있다 가만히 들어앉아 엄마는 네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지, 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때 보자기 속에 숨겨진 엄마의 귀는 빠르고 정확하게 나의 방문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기 속에 숨겨진 엄마의 손은 두껍고 큼지막해서 무엇이든 잘 뒤지신다, 내가 벗어놓은 옷가지와 몇 가지의 폐물, 가슴 설레는 어릴 적 예쁜 사진들이 엄마에겐 꼭꼭 감춰둔 비밀이 되어 있다 가끔씩 엄마를 만나러 간다 내가 보자기를 풀면 거기, 젊은 날 엄마가 나오신다 (그림 : 김우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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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 불꽃의 시간시(詩)/이수익 2020. 6. 25. 16:23
관현악이 일제히 숨을 멈추자 바이올린 독주자는 발끝을 들어올린 채 끊어질 듯한 음계를 오르내린다. 그의 심장과 폐, 내장이 먼저 불붙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그의 온몸이 송두리째 화염으로 타올라 무대 위에는 유일신처럼 독주자만 있을 뿐, 나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없다. 격렬한 조명 앞에 하얗게 노출된 그는, 순교자처럼 비장하다. 한 발자국 물러설 없는 발걸음을 디뎌 완벽하게 죽음의 벼랑 끝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펄럭이는 불꽃 그늘이 침묵하는 청중들의 가슴 위로 철렁, 내려앉는다. (그림 : 김주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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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 물 위의 달시(詩)/이수익 2019. 10. 30. 09:27
물은 달을 안고 있습니다. 가득히 넘쳐날 듯한 물이 그래도 넘치지 않고 평온한 수면의 제 얼굴을 지니고 있음은 물 가운데 저 달 하나가 떠 있기 때문입니다. 물은 사랑하는 달의 이지러지는 모습을 차마 두고 볼수가 없습니다. 가슴에 품은 달이 이지러짐은 곧 제 가슴의 이지러짐, 이런 물의 마음을 달도 아는지, 달은 눈부시도록 밝은 빛줄기를 물의 가장 부드러운 살결 위에 깊이 깊이 새깁니다. 물살은 떨면서 달빛의 낙인을 참아냅니다. 실로 아름다운 순응입니다. 달밤에 물을 보는 것은 또한 달을 보고자 이 마음 때문임을, 하마 그대는 아시겠지요. (그림 : 조선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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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 가을편지시(詩)/이수익 2019. 10. 28. 13:48
네가 오는 것은 눈물겨운 기다림만으로 족하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이별은 상처처럼 깊이 두렵고 가슴 저미는 일이지만 너는 왔다간 금세 가야 하니까 내 마음 위로 한닢 바람기 같은 뜬소문 같은 흔적이나 남겨 놓고 머물렀던 몇날 밤 쌓아올린 정분도 미련 없이 서둘러야 하는 발걸음처럼, 총총 떠나 버리는 너, 그래도 너를 기다리던 지난 여름 숱한 날들은 달력에 금을 긋고 바닷물의 간만을 지켜보며 한없이 즐겁고 떨리기만 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더 이상 바람이란 품어서는 안 될 허튼 나의 욕심 네가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대, 아, 젊은 정부(情夫)처럼 잠시 머물렀다간 훌쩍 가 버리는 가을, (그림 : 박희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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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 그리운 악마시(詩)/이수익 2019. 3. 28. 12:34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 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그림 : 박용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