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장석주
-
장석주 - 달팽이시(詩)/장석주 2019. 3. 20. 08:59
사는 것 시들해 배낭 메고 나섰구나. 노숙은 고달프다! 알고는 못 나서리라, 그 아득한 길들! (그림 : 이재복 화백)
-
장석주 - 내 스무 살 때시(詩)/장석주 2018. 10. 2. 18:44
참 한심했었지, 그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는 일마다 실패 투성이었지 몸은 비쩍 말랐고 누구 한 사람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지 내 생은 불만으로 부풀어 오르고 조급함으로 헐떡이며 견뎌야만 했던 하루하루는 힘겨웠지, 그때 구멍가게 점원자리 하나 맡지 못했으니 불안은 나를 수시로 찌르고 미래는 어둡기만 했지 그랬으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바다 속을 달리는 등 푸른 고등어 떼처럼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으니, 산책의 기쁨도 알지 못했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을 건넬 줄도 몰랐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무지로 흘려보내고 그 뒤의 인생에 대해서는 퉁퉁 부어 화만 냈지 (그림 : 이수진 화백)
-
장석주 - 소금시(詩)/장석주 2014. 5. 12. 01:18
아주 깊이 아파본 사람처럼 바닷물은 과묵하다 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다 현무암보다 오래된 물의 육체를 물고 늘어지는 저 땡볕을 보아라 바다가 말없이 품고 있던 것을 토해낸다 햇빛을 키우는 것은 단 하나다 한 방울의 물마저 탈수한 끝에 생긴 저 단단한 물의 흰 뼈들 저것이 하얗게 익힌 물의 석류다 염전에서 익어가는 흰 소금을 보며 고백한다, 증오가 사랑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었음을 나는 여기 얼마나 오래 고여 상실의 날들을 견디고 있었던 것일까 아주 오래 깊이 아파본 사람이 염전 옆을 천천히 지나간다 어쩌면 그는 증오보다 사랑을 키워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림 : 황기록 화백)
-
장석주 - 엽서 1시(詩)/장석주 2014. 1. 8. 15:03
저문 산을 다녀왔습니다 님의 관심은 내 기쁨이었습니다 어두운 길로 돌아오며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지만 내 말들은 모조리 저문 산에 던져 어둠의 깊이를 내 사랑의 약조로 삼았으므로 나는 님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에 못 견딜 그리움들이 화약처럼 딱딱 터지면서 불꽃의 혀들은 마구 피어나 바람에 몸부비는 꽃들처럼 사랑의 몸짓을 해보았습니다만 나는 그저 산아래 토산품 가게 안 팔리는 못난 물건처럼 부끄러워 입을 다물 따름입니다 이 밤 파초잎을 흔드는 바람결에 남몰래 숨길 수 없는 내 사랑의 숨결을 실어 혹시나 님이 지나가는 바람결에라도 그 기미를 알아차릴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림 : 김기택 화백)
-
장석주 - 엽서 2시(詩)/장석주 2014. 1. 8. 15:02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님을 향한 길로 들어선 것은 굳이 운명이라고 할 것까진 없겠습니다 길가에 널린 적의를 품은 돌멩이들 어두운 숲 속엔 맹금류의 사나운 눈빛은 번들거리지요 하지만 그 길로 나를 이끈 것은 내 의지와 힘보다 더 큰 어떤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때없이 스쳐가는 바람의 유혹에 빠졌다고 날 저물고 어둔 하늘 초록별의 손짓에 따랐다고 그 길을 에워싼 숲의 깊은 죄가 아니지요 님을 향해 가는 길은 내 기쁨이지만 시련과 수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많이 굶은 내 위장, 부족한 잠으로 늘 고단한 저 붉은 노을 속 주림과 쫓김의 거칠고 긴 내 행려 허물어진 몸뚱아리 마침내 병 도져 쓰러지면 서편 하늘 선회하는 까마귀들 더욱 까악 깍 거리겠지요 땡볕 걷히고 소슬한 어둠 내리는 이 저녁 한길가에 부은 발등 지..
-
장석주 - 엽서 3시(詩)/장석주 2014. 1. 8. 15:02
사랑은 노래처럼 의지를 앞질러 입술을 간질이며 지나갑니다 그걸 의지의 빈곤이라고 크게 낙담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랑의 속성이었지요 예전엔 사랑은 강철의 무지개라고 믿었지요 그건 황홀하게 아름답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마구 헝겊처럼 헤집어 놓는 위험한 것이라고요 사랑은 그렇게 위험한 것이 아니지요 남쪽 항구를 여행하다가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배들을 보고 저거다, 사랑은 저런 모습니다, 라고 소리쳤지요 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험란한 물길 몇 굽이 건너 황혼 속에 깊은 안식에 드는 저 배들과 같이, 조금은 깨지고 부서졌지만 늠름히 다음 향해를 꿈꾸며 깊은 잠에 드는 저 배들과 같이, 돌아와 님의 품에 잠들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은 노래처럼 내 의지를 앞질러 입술을 간질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