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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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등(燈)에 부침시(詩)/장석주 2013. 12. 30. 16:22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뛰어 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져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그렁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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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밥시(詩)/장석주 2013. 12. 30. 16:15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지켰어야 할 약속과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 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룟 유다가 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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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가을 법어(法語)시(詩)/장석주 2013. 12. 30. 16:08
태풍 나비 지나간 뒤 쪽빛 하늘이다 푸새것들 몸에 누른빛이 든다 여문 봉숭아씨방 터져 흩어지듯 뿔뿔이 나는 새떼를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이 삼킨다 대추열매에 붉은빛 돋고 울안 저녁 푸른빛 속에서 늙은 은행나무는 샛노란 황금비늘을 떨군다 쇠죽가마에 괸 가을비는 푸른빛 머금은 채 찰랑찰랑 투명한데 그 위에 가랑잎들 떠 있다 몸 뉘일 위도에 완연한 가을이구나! 어두워진 뒤 오래 불 없이 앉아 앞산 쳐다보다가 달의 조도(照度)를 조금 더 올리고 풀벌레의 볼륨은 키운다 복사뼈 위 살가죽이 자꾸 마른다 가을이 저 몸의 안쪽으로 깊어지나 보다 (그림 : 심만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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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명자나무시(詩)/장석주 2013. 12. 30. 16:06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림 : 황복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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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술 마시는 남자시(詩)/장석주 2013. 12. 27. 21:36
다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술을 마시네 술 취해 목소리는 공허하게 부풀어오르고 그들은 과장되게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욕을 하네 욕은 마음 빈곳에 고인 고름, 썩어가는 환부, 보이지 않는 상처 한 군데쯤 가졌을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었으면 좋겠네 취해서 누군가를 향해 맹렬히 욕을 하는 그대, 취해서 충분히 인간적인 그대, 그대는 날개 없는 천사(天使)인가 그들 마음의 갈피에 숨어 있던 죄의 씨앗들 밖으로 터져나와 마음 한없이 가볍네 그 마음 눈 온 날 신새벽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풍경이네 술 깬 아침이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네 그렇다 할지라도 욕할 수 있었던 간밤의 자유는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냐 (그림 : 이상권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