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오규원
-
오규원 - 유리창과 빗방울시(詩)/오규원 2016. 9. 22. 21:04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이번에는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이렇게 왁자하게 달라붙었습니다 한동안 빗방울은 그리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 위에까지 다시 적막이 잔뜩 달라붙었습니다 유리창은 그러나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다시 적막을 한 군데 뜯어내고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빗방울은 소식이 깜깜했습니다 (그림 : 임미라 화백)
-
오규원 - 바다의 길목에서시(詩)/오규원 2015. 4. 15. 12:41
나는 바다의 길목에 서 있었고 수평선은 내 심장의 높이에 걸쳐졌다 바다의 높이가 가슴까지 올라와 수평선이 내 심장에 걸쳐져도 나는 담담하지 않았다 나는 바다 밖에 서 있었으므로 바다는 나를 잠글 수 없었고 할 일 없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 비운 내 곁 빈집의 대문을 잠그고 있었다 내가 바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바다는 주검이나 주검의 위치에서 나와 마주서 있었고 마주보고 서 있어도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내 옆사람 속으로 들어가 서서 사람을 통해 구부러지는 길과 무덤을 보고 내 머리 위에 탕아처럼 누운 정신나간 하늘을 보았다 바다는 내 앞에서 내 아픈 곳을 들여다보며 수평선을 만장(輓章)의 높이까지 들었다 놓았지만 나는 나를 비워두었으므로 바다 앞에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마치 탕..
-
오규원 - 작은 별에 고독의 잔을 마신다시(詩)/오규원 2015. 4. 14. 17:02
별을 낳는 것은 밤만이 아니다 우리의 가슴에도 별이 뜬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슴도 밤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에 별이 뜨지 않는 날도 있다 별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 있듯 우리가 우리의 가슴에 별을 띄우려면 조그마한 것이라도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다른 것을 조용히 그리고 까맣게 지워야 한다 그래야 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므로 별이 뜨는 가슴이란 떠오르는 별을 위해 다른 것을 지워버린 세계다 떠오르는 별이라 부르면서 잘 반짝이게 닦는 마음 ㅡ 이게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은 사람일수록 별을 닦고 또 닦아 그 닦는 일과 검정으로 까맣게 된 가슴이다 그러므로 그 가슴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광채를 가진 사람이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므로 사랑은 남을 반짝이게 하는 가슴이다 사랑으로 가득찬 곳에는..
-
오규원 - 한 잎의 여자시(詩)/오규원 2014. 6. 3. 19:03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그림 : 오정익 화백)
-
오규원 - 한 잎의 여자 2시(詩)/오규원 2014. 6. 3. 19:00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는 ..
-
오규원 - 한 잎의 女子 3시(詩)/오규원 2014. 6. 3. 18:30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女子, 그레뉼 같은 女子, 모카골드 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女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