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손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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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몸국시(詩)/손세실리아 2019. 8. 18. 22:40
몸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암록색 해조류인 몸말에요 남쪽 어느 섬에서는 그것으로 국을 끓여내는데요 모자반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몸이라 하는지 사람 먹는 음식에 하필이면 몸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먹어보면 절로 알아진다는데요 단, 뒤엉켜 배지근해진 몸의 몸 설설 끓는 몸들이 당신을 빤히 올려다보거든 시선을 얼른 피하셔야한다는데요 십중팔구 속내 도둑맞을 테고 늑골 마구 결릴 테니까요 몸이 몸을 먹는 일 한 외로움이 한 외로움을 먹어치우는 일 그거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은 울컥하기도 경건하기도 한 의식이잖아요 것 봐요 내 뭐랬어요 주의하랬잖아요 생각이 예까지 이른 걸 보니 그새 몹쓸 몸에 제압당한 게 분명해요 몸이 화두가 된 게 확실해요 사랑을 폐한 게 틀림없어요 식어 뻣뻣해진 몸을 물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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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벼락지시(詩)/손세실리아 2019. 8. 18. 22:33
마실 다녀온 노모 손에 상추 한 봉지 들려 있습니다 좌판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사 들고 오기 시작한 지 아흐레쨉니다 처음 며칠은 밥도둑 저리 가라던 것이 며칠 지나지 않아 풋내도 나고 물려 본척만척했더니 집안일에서 손 뗀 지 오래인 당신 손수 버무리기 시작합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날랜지 잎에 간 밸 틈 없고 금방이라도 밭으로 기어갈 듯 싱싱합니다 곧 고동 오를 테니 며칠만 더 참고 먹어주자 설마 쇠어빠진 거 갖고 나오겠냐 차려주는 밥상도 귀찮을 나이에 오죽하면 뙤약볕에 나와 종일 저러고 있겠냐 잊었는지 모르겠다만 나도 너 그렇게 키웠다 천둥번개 치듯 벼락 때리듯 삽시간에 무쳐 내놓은 준엄한 말씀 한 접시 벼락지 : 겉절이의 전라도 말 (그림 : 박찬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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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두모악에 전하는 안부시(詩)/손세실리아 2019. 8. 18. 22:29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고집하지도 않았다 포획하기도 전에 이미 그대 생의 일부였다가 전부이기도 했던 제주의 구름 바람 오름 약속한 편지 한 줄 여태 쓰지 못했으나 나의 가슴벽은 수시로 웅웅거렸다 그때마다 굳어가는 그대 망막 속 이어도를 배회했다 이쯤에서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두라며 피식 웃어주면 좋겠다 그럴 여력이라도 제발 남아 있기를 쪽창 너머 무연한 눈길로 그대 나를 배웅한 지 한 계절이 훌쩍 울담을 넘었다 두고 온 두모악 뜨락 눈발 속 키작은 수선화는 다 졌을 테고 창백하기 그지없던 그대 이마 봄볕에 조금은 그을렸을까 그랬을까 손가락 근육 한 올 그 새 또 석고처럼 딱딱해졌을지 모를 일이나 그대 사는 섬 나 다시 찾는 날 우리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손바닥만 한 쪽창에 앉아 나 마중해주시기를, 부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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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육지것시(詩)/손세실리아 2019. 4. 3. 09:43
섬 토박이들 사이에 이주민은 육지것으로 지칭된다 처음엔 어이없고 불쾌했지만 내막을 알고 나니 수긍이 갔다 입도 초기엔 입안의 혀처럼 곰살궂다가 차릴 잇속이 없어지면 돌연 안면 몰수해버리는 얌체가 숱하기 때문이란다 반면 육지에서 유입된 배추는 고유명사처럼 육지배추라 부른다 쉬 무르지 않아 겨울철 장기저장이 용이한 까닭이다 섬에 건너와 환대받기까지 다만 묵묵히 본분에 충실했을 속이 꽉 찬 진녹빛 생 앞에서 마음 일부는 육지에 두고 몸뚱이만 섬에 부려놓은 채 마치 뼈를 묻을 것처럼 입만 나불댔던 섬살이를 돌아본다 배추만도 못한 (그림 : 채기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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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찔레꽃시(詩)/손세실리아 2017. 11. 27. 12:53
여린 살갖 비집고 내려온 아가의 젖니같은 낯바닥으로 창백히 웃고 있었다, 너는 상처의 상처조차 두려워 산기슭 개울가로 숨어들어가 나무이면서도 풀처럼 무릎 꿇고 순백의 꽃 한 무더기 덤불 속에 낮게 내려 놓았다, 너는 사랑아, 내 가엾은 사랑아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말아라 네가 몸 눕혔던 그늘진 땅에 나 맨발바닥으로 들어서노니 연둣빛 가시 무르게 만들어 맞이해다오 이윽고 꽃 진자리 갈라터진 마음 정수리에 피멍같은 찔레 열매만 붉디 붉을지라도 한때 사랑했던 기억만으로 우리 남은 생 버텨낼 수 있지 않겠니 (그림 : 김동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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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산수유 마을에서 일박시(詩)/손세실리아 2015. 4. 21. 14:21
구례 산수유 마을에 갔다가 소소리바람 덜덜 떨고 서 있는 이마 까칠한 어린 산수유나무를 만났다 행여 잔가지 다칠까 걸음 단속했음에도 돌담 밖으로 불거져 나온 어깨 한 켠 미처 피하지 못해 툭 밀치고 말았나보다 못마땅한 듯 빤히 쏘아보더니만 내 낯빛 속 숨은 그림이라도 찾아냈다는 듯 조동이 움찔움찔 실소하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마른 꽃눈들 예제서 총총 휘둥그레져 민박집 황토마당으로 오르르 몰려들고 황색경보 발령된 아찔한 그믐밤 발칙한 것 같으니라구 한낱 산꽃인 주제에 내 안에 숨겨둔 사랑을 감히 엿보다니 낱낱이 발설해놓고 저토록 딴청이라니 (그림 : 박용섭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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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덕적도시(詩)/손세실리아 2015. 4. 21. 14:14
옹진군 덕적 포구의 감청 빛 하늘엔 제 몸의 열꽃 소등시키지 못해 뒤척이다 덕석 같은 모래밭으로 추락한 성운 한 무리 뒹굴고 난바다로 달아나려다 발목 붙잡힌 폐선 하나 소금기둥으로 못 박혀 있다. 집어등에 홀려 먼 길 헤엄쳐온 살오징어 축 처진 귀때기 지느러미가 부표로 떠다니고 더는 물러 설래야 물러설 곳 없는 중늙은이들이 길바닥에 퍼질러앉아 그물코 꿰매는 섬땅. 소사나무 구부러진 가지 가닥가닥 침몰하는 노을 향해 허리 숙일 때, 적송 숲 솔방울도 은빛 살내린 갈대도 저마다 봉숭아 빛 지등 제 몸 안에 켜들고 황해로 황해로 길을 트는 소슬한 포구 허름한 선술집에서는 폐경을 넘긴지 오래인 작부가 생의 마지막 사내를 맞기 위해 서둘러 술잔을 비울테고 섬 끝 손바닥만한 사구에서는 온 밤 내 해당화가 서늘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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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 바닷가 늙은 집시(詩)/손세실리아 2015. 4. 21. 14:06
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 수만 평이 우르르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그림 : 차일만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