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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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뒤통수 연가시(詩)/문성해 2021. 12. 30. 14:07
나는 점점 마주 오는 사람과 눈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개하고나 눈 마주치다 그 개가 그르릉거리는 소리라도 하면 얼른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깐다 나는 점점 마주 오는 사람이나 마주 오는 개보다는 오히려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가 이리 편안해지니 나는 이제 안전하고 무고하리라 아침 공원에서 뒤통수들과 안면을 트고 뒤통수들을 품평하고 뒤통수들과 사랑을 한 지 여러달 이제 낯익은 뒤통수라도 만나면 달려가서 뒤통수를 치고 싶어진다 연신 삐딱거리다가 끄덕거리는 것을 보니 그도 나를 알아본 모양 내 뒤통수가 괜히 가렵거나 스멀거린다면 내 것도 누군가를 알아보았단 증거 그때는 조용히 뒤통수의 일은 뒤통수에게 맡긴 채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내 뒤통수는 이제 많은 것들과 실실거릴 것이다 이것이 뒤태를 가진 자들의 살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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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처서시(詩)/문성해 2020. 11. 6. 18:05
나는 오늘 가을볕 속으로 빨래가 물기를 털어 내는 걸 바라보면서 그러고도 내 습진을 내다 말릴 수 있게 넉넉함이 남아도는 이 볕이 좋고 헛헛한 위장 속으로 수제비를 같이 흘려 넣을 가난한 식구가 있어 좋고 볕이 처마를 오지게 지지는 오후가 되어서는 늙은 염소처럼 우물거릴 수 있는 햇고구마가 있어 좋고 오늘은 큰 놈에게 안경 해 줄 돈이 품에 넉넉히 있으니 더욱 좋고 그러고도 더 좋은 건 일생에서 가장 높고 맑은 날 중의 하나인 오늘이 아직도 이마 위에 두둑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림 : 노태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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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난초도둑시(詩)/문성해 2020. 10. 24. 19:16
도둑이 되려면 난초도둑쯤은 돼야지 돈다발과 패물을 자루 속에 쓸어 담기보단 하나에 몇 억 한다는 난초 분 하나는 업고 나와야 일등 도둑이지 천하의 도둑은 장물의 맘을 살펴야 하는 법 그 가는 옆구리들의 떨림에 집중해야 난초도둑이지 암, 뒤꿈치를 들고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난초들처럼 나도 세상에 나서 큰 도둑이나 한번 돼 보아야지 밖에서 트럭은 부릉부릉 빨리 서두르라지만 나는 개의치 않을 거야 귀를 찢는 보안벨이 울려도 천천히 걸어 나올 거야 나 같은 것 백 명은 팔아도 못살 그것을 내 천한 심장 가까이 기대인 채로 난 민들레 씨앗 내려앉는 언덕에다 그것을 심어 줄 테야 더덕더덕 억센 뿌리를 내리게 둘 거야 몇 억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할 거야 왕후의 자리에서 여염의 촌부로 만들어 줄 거야 다시는 뽑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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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능소화시(詩)/문성해 2020. 7. 13. 17:06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 머리를 올리고야 만다 목 아래가 다 잘린 돼지 머리도 처음에는 저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 한 번도 아랫도리로 서본 적 없는 꽃들이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랗게 머리가 얹혀 웃고 있다 머나먼 남쪽 어느 유곽에서도 어젯밤 그 집의 반신불수 딸이 머리를 얹었다고 한다 그 집의 주인 여자는 측백나무처럼 일없이 늙어가던 사내 등에 패물이며 논마지기며 울긋불긋한 딸의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짊어 보냈다고 한다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 우툴두툴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도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이 있다 능소화의 꽃말은 여성, 명예이다. 이 꽃은 질 때에도 꼿꼿이 눈 시퍼렇게 뜨고 제 모습 그대로 떨어진다. 명예를 지키는 여성 같다. (그림 : 홍영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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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봄밤의 냄새시(詩)/문성해 2020. 4. 13. 12:03
꼭 십구세만 말고 늙음이 만개할 때도 꽃이라 치자 꽃이 활짝 피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민경이 할머니 얼굴을 마주하면 묵은 향기에 내 옅은 졸음이 다 흔들려지 꽃받침이 꽃을 모시듯 차곡차곡 접혀진 목 위에서 주름진 얼굴이 송이째 웃을 때는 꽃송이가 쿵, 떨어질라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야 하지 어스름이 처마로 슬슬 내려앉는 시각 목련꽃들이 쉬 꽃잎을 접지 못하는 것과 마루에서 가갸거겨 한글공부 하던 민경이 할머니가 간혹 한숨을 쉬는 이유는 똑같은데 꽃이 꽃을 불러낸 듯 마당으로 내려선 민경이 할머니가 공중의 목련꽃들과 향기를 섞는 시큼덜큰한 봄밤이네 (그림 : 김한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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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꽃은 신상(新商)이 아니야시(詩)/문성해 2020. 4. 13. 11:59
마른 꽃나무에 봄꽃들이 벌써 다 번졌네 한 때는 그 꽃 빛을 내 다 받아서 내 마음이 이리 심란한 줄 알았건만 이제야 알겠네 꽃 빛은 어디 먼 데로 가는 게 아니라 제 속으로 풍덩 우물처럼 빠지는 것 왔던 길을 도로 밟아 돌아가면 몇 겹의 알토란 같은 방이 있고 그 속에서 몇 계절을 견디고 봄이면 다시 바알갛게 담뱃불처럼 돋아 오른다는 것을, 내가 한창 물오른 꽃이었을 때 그 찬란은 어디 갔던 게 아니고 시들기 시작하는 내 몸 구석구석을 추억으로 불 밝힌다는 것을 그렇다면 저 꽃들은 모두 중고품들인데 너무 신상으로 보이는 거 아니야? 그 비결이 뭘까 맴도는 나를 본 체 만 체 꽃나무는 십 년 동안이나 어디 가지도 않고 제 속에서 분홍 손수건을 꺼내어 펼쳤다가 다시 접어 넣었다간 하는 것이네 미간에 마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