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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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첫물 수련시(詩)/문성해 2014. 8. 9. 23:56
수련이 언제 이리 피었나 흙탕물 논물 위에 첫 수련이 돋았구나 오늘 아침 세수도 못하고 짓무른 눈가 비비며 보는데 누가 지어주나 이름도 기다리지 않고 수련이 작년의 이름으로 내 곁에 왔네 첫 수련의 주둥이가 막막한 수면을 뚫고 나오는 그 힘으로 드넓은 고추밭 첫 고추가 매달리고 아이 몸에 첫 두드러기가 돋고 마른하늘에선 첫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야 그다음엔 후득후득 일제히 돋아나면 되는 것 터져나오면 되는 것 그 힘으로 희부윰한 새벽을 찢으며 첫 기러기떼가 날아오르는 것이야 (그림 : 이석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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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시(詩)/문성해 2014. 2. 23. 16:20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 듯이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 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 산 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너와 나 사이 더운 밥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으깨지고 바숴진 음식 냄새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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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각시 투구 꽃을 생각함시(詩)/문성해 2014. 1. 3. 22:20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 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 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서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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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 자작나무시(詩)/문성해 2014. 1. 3. 22:19
너의 상처를 보여다오 아무도 내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허연 붕대를 휘날리며 서 있는 자작나무들 오래전 죽은 자의 수의를 걸쳐 입은 듯 온몸이 붕대로 친친 감긴 나무들의 미라여 지하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그를 지상으로 발굴한 자는 누구인가 보름달 빛이 고대의 자태로 내려오는 밤이면 붕대자락이 조금씩 풀린다 하고 그 속에서 텅텅 우는 소리 들린다 하고 나는 태초에 걸어다니는 족속이었으니 이것을 푸는 날은 당당히 걸어가리라 그때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의 연둣빛 나무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원형의 전설을 들은 듯 한곳에 내린 뿌리가 조금씩 들뜬다 (그림 : 임정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