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전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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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귀촌시(詩)/전영관 2019. 1. 19. 19:59
오후 네 시의 햇살은 손이 느리다 옆집 숟가락까지 챙기는 산촌의 오지랖처럼 호박이며 무와 몸을 뒤채는 가지까지 매만진다 당신은 등 돌리고 앉아 오가리들과 자분자분 비밀이라도 있는 듯 들췄다가 남이 들을까 가만히 덮고 여고 동창생 표정으로 내가 모를 것을 나눈다 겉마르기 전에는 탱탱했다고 사소한 것들도 내남없이 화려했던 날은 있겠지 마음 단단히 먹어야 귀촌한다고 우쭐대면서 진지한 척 머리로만 예행한다 조붓한 당신 뒷모습을 콩밭에 앉혀놨다가 주방으로 가는 걸음걸이를 파스 사러 읍내 나가는 길 위에 올려본다 서울 새댁 곱다느니 머리숱도 많다느니 허리 굽은 인사말에 매달려 노인네들도 동행하겠지 읍내 나갔으니 중국집까지 들르겠지 아내는 콩밭에 앉히고 읍내 심부름이나 시키고 녹슨 보습만큼 게으른 나는 밭고랑과 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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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단속(斷續)시(詩)/전영관 2018. 3. 21. 23:16
하늘은 저도 제 속을 모르겠는 사춘기 한 귀퉁이 말갛고 반대편 매지구름 을근거린다 골몰하느라 사위가 자욱하다 나무마다 초록을 꺼내는 속도가 다르다 조숙하게 야린 이파리들은 흔들린다 머뭇거리느라 조막손을 내민다 긴 울음의 끝은 고요하고 파탄 뒤에 오는 것들은 애틋하다 물웅덩이에 고여 맴도는 꽃잎들 박새가 물고 날아가는 한낮의 적막 곁을 얻지 못하고 그늘에 홀로 살림 차린 진달래 산벚나무 꽃잎 날린다 민들레 몇 밟았으니 비긴 셈이라고 바람을 앞세운다 대답없이 오래 안아 있었다 하늘은 여전 제 속도를 몰라 서쪽으로 당황한 빛 역력하다 이른 노을은 내진(內診)을 기다리는 여인의 안색이다 사랑을 아느냐고 누가 물으면 천지간 그리 독한 게 있더라고 울 것 같은 4월이다 (그림 : 김성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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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벽촌서신시(詩)/전영관 2018. 3. 21. 22:57
햇살이 잘 여물어 한 줌 습기도 없습니다 봄에야 몽롱하니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고 여름에는 빗물이 섞여 불량품이 될 게 자명했기에 땡볕일지언정 탐내지 않았습니다 주먹만 한 크기로 눌러 농축시켰으니 전등 대신 방에 달면 맞춤입니다 저녁에 뭉친 것들은 노을빛이 스미어 은은합니다 망설이다가 가을을 절반이나 허비했습니다 마당에 두면 찬연하고 따사로운데 방에 걸면 시나브로 사위는 것이 제가 주인이 아니라는 뜻만 같습니다 그 방에서나 환하고 은은하고 청명할 모양입니다 어둠은 내 혈족 눅눅함은 나만의 소유 적막이 이곳의 특산물이지만 뭉쳐둔 빛만 들고 가겠습니다 마당에 보퉁이 있거든 다녀갔구나 여기시면 됩니다 시월은 시월이고 단풍만이 단풍입니다 당신만이 나의 당신임을 용서바랍니다. (그림 : 김순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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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습관성시(詩)/전영관 2018. 3. 21. 22:48
빈 광주리를 그대 곁에 놓아두겠습니다 가는 빗소리로 올을 엮었습니다 고리 긴 여름을 따라 그늘이나 탕진하러 가겠습니다 무화과나무 둥치에 앉아 어룽거리는 빛의 무늬들을 파도인양 바라보겠습니다 멀미가 올라오면 다디단 열매로 속을 씻고 날을 새우기 시작한 바람으로 이마를 씻고 다시 앉아 월출산 넘어 제 시름에 여위는 조각달을 보겠습니다 돌아오면 광주리만 기다리고 있겠지요 깊어진 그대가 일광의 알곡들을 거둬두고 갔겠지요 서리가 다녀가고 이파리도 사위어 천지간이 비어버릴 때까지 눈으로 읽고 손으로 읽기만 하렵니다 폭설이 백지 한 장 마련해주면 붓을 들어 한 알마다 들어찬 팔만하고도 사천 자를 필사하겠습니다 해토머리까지 거듭하다가 누구를 기다렸는지도 습관처럼 잊겠습니다 꽃구경이나 가겠습니다 진달래를 처음인듯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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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오래된 나무들시(詩)/전영관 2018. 3. 21. 22:30
봄눈은 젊어서 비탈 버거운 줄 모른다 맥문동 푸른 것들만 몸을 뒤챈다 도무지 올라올 수 없는 비탈인데 시장기는 걱정보다 힘이 세서 한 끼니 거르면 한 걸음 먼저 가게 된다고 무릎이 채근한다 노인복지관 식당은 만원이다 훈김은 내려가기 근심스런 바깥을 지운다 매운 것 빼달라고, 미역국 더 담으라고 누룽지는 잘 물렀는지 헐렁한 웃음으로 재차 묻고 한 상 받아 아는 얼굴끼리 모여 앉는다 점심 한 끼니 넘기는 모습이 지극하기도 하고 깊어지는 입가의 주름들이 시장기를 앞세운 빚쟁이들 같기도 해서 사람이란 존재가 늙도록 젊은 나무였으면 했다 그칠 줄 모르는 창밖 눈발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더 담느라 모자라는 반찬을 걱정하다가 누가 누구에게 자원봉사하는 중인지 마음도 미끄러진다 (그림 : 권오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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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남행시(詩)/전영관 2018. 3. 21. 22:25
꽃은 무릎으로 봐야지 고개 들게 만드는 벚꽃 말고 민들레나 제비꽃은 무릎으로 만나야지 귀퉁이에 의붓자식처럼 주저앉아 버짐 핀 노랑을 보면 갈잎을 밀치며 올라오는 보라색 표정을 보면 등신이라 핀잔하고 싶은 것이다 저 잘난 벚꽃을 반이라도 닮을 일이지 청산도행 여객선 이물에 서 있으련다 꼭 있어야만 하겠다는 것들로 보퉁이 여미고 입도(立島)하는 노인네들 안색에서 벚꽃 아닌 민들레 제비꽃을 볼 수 있겠다 봄이 설렘이라는 거짓말은 누가 유통시켰나 설탕물 같은 약속은 또 누가 마셔 버렸나 먹던 떡 같은 노인네들 이마의 주름이나 세면서 내리겠다 못 먹고 자란 장남처럼 키 작은 소나무 허리께를 얼굴 잊은 동창생 되어 만져 보겠다 두어 걸음마다 민들레 제비꽃 들여다보느라 무릎 구부릴 걸 짐작한다면 엽서 따위는 기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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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휘청거리는 오후시(詩)/전영관 2018. 3. 21. 22:22
구룡포에 비 온다 젖을까 두려워 양말 안으로 몸을 숨긴 바지들이 모여든다 몇몇은 비린내에 절었고 하나는 비늘을 바르고 왔다 구부리고 사느라 무릎 불거진 바지들이 원탁에 둘러 앉았다 홧김에 물을 먹었는지 허망하게 물이 샜는지 장화도 바닥에 하소연을 해댄다 질컥거린다 어판장서 당한 분풀이로 동댕이 쳐진 하나 집 나간 마누라 찾아달라는 생청 통에 얻어터진 하나 항구 모퉁이 선술집까지 흘러왔으면 볼 거 없다는 표정의 양은사발들이 원탁에 모여 서로를 외면한다 꾸덕꾸덕 바지는 마른다 불거진 무릎은 들어가지 않는다 입 벌린 장화는 제풀에 겉마른 척 주인을 기다린다 찌그러진 양은사발들만 연탄불을 건너다니고 빙빙돈다 망자는 없는데 눈치 모자라는 담배 연기가 향불 자세로 흔들린다 구룡포에 비 온다 거짓말 못 하는 유리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