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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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동거시(詩)/최영철 2022. 5. 11. 10:44
안경과 오래 살았다 내가 안경을 데리고 산 줄 알았는데 안경이 나를 데리고 살았다 내 길은 보이지 않고 안경이 가자는 길을 따라왔다 잠들기 전 내가 안경을 벗어둔 줄 알았는데 안경이 나를 벗어두었다 안경이 꾸었던 꿈을 나는 훔쳐보았다 안경이 닦아 놓은 해맑은 꿈을 따라다녔다 내 코가 안경다리를 받든 줄 알았는데 안경다리가 내 코에 양반다리를 했다 더듬더듬 내가 안경을 찾는 줄 알았는데 안경이 눈을 번득이며 나를 찾아와 주었다 내가 본 게 단 줄 알았는데 안경이 돌아서서 차린 딴살림이 한 보따리다 너의 허물을 내가 눈감아준 줄 알았는데 네가 내 허물을 다 눈감아 주었다 (그림 : 이현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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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손시(詩)/최영철 2020. 11. 28. 11:16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닐 때가 좋았다 돈이래야 고작 몇천원, 아니면 몇백원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며 만화대본소 앞에도 서보고 구멍가게 앞에도 서보고 삼류극장 앞에도 서보고 호주머니 속이 답답해서 돈은 어서 빠져나가려고 안달이고 나는 어서 내보내지 않으려고 안달이었다 바다에서 우리집까지 기력을 다해 걸어온 적이 있었다 호떡집 앞을 지나쳤고 한 스무 개쯤의 버스정류소를 그냥 지나쳤다 돈하고 나하고 싸우는 동안 어느새 집앞이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닐 때는 심심하지도 않았다 배고프지도 않았다 돈은 고작 몇천원, 몇백원일 때가 더 많았지만 호주머니는 불룩하고 통통하고 내 손은 따스했다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말을 걸 때도 건달들하고 시비가 붙었을 때도 호주머니에 손만 찔러넣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요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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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암각화의 말시(詩)/최영철 2020. 8. 19. 16:55
네가 너에게 보낸 오래전 그 말 몰래 보고 혼자 가로챌까 봐 지워지지 않을 자리에 그려 둔 그 말 저만큼 찢어 날려 버릴까 봐 수수만년 비와 바람이 시샘하여도 꼭꼭 붙잡아 가슴에 안아 끄떡없도록 저리 버티고 선 등판에 박아 둔 말 영영 아주 먼 데를 찾아 헤맨 너를 향해 자꾸 손 흔들어 부르고 있는 말 귀먹어 못 알아들을까 봐 까막눈이라도 더듬어 알아듣도록 저리 공들여 새겨 놓은 말 아직 한 번도 주고받지 못하였으나 아직 멀리서 웅성대는 소리에 바위 문을 밀치고 나와 네가 너를 맞이하고야 말 그 말 바위의 귀가 꼭꼭 담아 놓고 있다가 네가 너를 얼싸안을 때 터져 나오고야 말 그말 (그림 : 이혜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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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서면 천우짱시(詩)/최영철 2019. 7. 24. 10:18
지금도 서면 천우장 앞이라고만 하면 다 통한다 30년 넘은 약속장소 비밀스런 상처를 서로 덧내지 않으려고 누구도 '그거 옛날에 없어졌잖아'하고 말하지 않는다 천우장 앞에서 시작하고 끝낸 사랑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10년도 전에 20년도 전에, 그 전의 전에도 천우장이라는 고급 음식점에는 도통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서면 천우장 앞이라고만 하면 다 통한다 그 길목 모퉁이 엉거주춤 어떤 자세로 서 있으라는 건지도 다 통한다 큰길 버스 내리는 녀석의 구부정한 어깨가 잘 보이는 지점 지하도 건너 불쑥 떠오르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대는 지점 저쪽 뒤편 시장골목을 지나 치마자락이 나풀대며 걸어오는 지점 서면 천우장 앞으로 그렇게 걸어온 것들이 와서 멈추는 곳 주머니에 든 몇 닢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한번은 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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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마지막 한 잔시(詩)/최영철 2017. 10. 12. 10:50
살아서 마시는 마지막 잔인데 안주가 없다는 게 쓸쓸한 일이었다 여보게 별고 없었는가 오래만에 내 잔 받게나 주거니 받거니 술 동무가 없다는 게 적적한 일이었다 신김치 몇 토막 안주 삼아 거나해지다 어느 대목에선가 토라져 깡소주 몇 잔 연거푸 들이켤 마누라도 없다는 게 서글픈 일이었다 밀린 술값 닦달하다 어떻게든 곱게 달래 보내려고 어르고 달래던 늙은 주모도 없다는 게 허전한 일이었다 길바닥에 구겨져 있을 그를 쓸어 담아 줄 눈 좀 떠 보라고 재촉할 누군가도 없다는 게 서러운 일이었다 유일한 용기였던 술잔을 비우기 전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던 자신에게 '원 샷'하고 낮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러고 나니 더 할 말도 없었다 느닷없는 제의에 자신이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는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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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햇살 한 줌 시키신 분시(詩)/최영철 2017. 6. 8. 12:12
이것은 하늘의 인증을 받아 금방 출하된 것 하늘 아래 모두 밥 주라는 지엄한 분부 혹시 게을러빠진 녀석들 있을지 모르니 골고루 찾아 먹이라는 살가운 당부 제 심은 것에만 눈길 주는 옹졸한 널 나무라는 하늘 높으신 분의 뜨거운 질타 어둠이 가고 또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누구나 속속들이 사랑하라는 지엄한 말씀 바로 서서 내리는 것만으로 안심이 안 돼 몸 기울여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모두 나눠먹게 바람에 버무리기까지 하늘 주방장 막 뽑아낸 햇살 몇 올 후려치고 떠밀고 항로를 바꿔가며 특급으로 막 배달된 푸짐한 코스요리 구운 햇살 간질간질 볶은 햇살 잘 말린 쫄깃한 햇살 잠자코 기다린 응달 구석 풀 한 포기 옳지 여깄구나 정확히 찾아 문 두드리는 중 거기 딸려온 꽃가루 한 접시 특별관리 고객에게만 내는 모처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