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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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밥과 술시(詩)/최영철 2017. 1. 25. 10:47
허기져 허겁지겁 쑤셔넣는 밥 한 덩이 그리워 들이키는 술 한 자락 밥은 꼬박꼬박 들어오는 봉급 같아서 곳간에 차곡차곡 쟁여두는 것 술은 빈속에 찔러주는 용채 같아서 이게 웬 횡재인가 벌컥벌컥 한달음에 탕진하는 것 밥은 불끈 솟는 힘이요 술은 흐드러지는 흥이니 밥은 종종걸음이요 술은 지그재그 팔자걸음이라 밥을 뛰쳐나와 멀리서 손사래쳐야 술 나 몰라라 한동안 내버려둬야 술 밥이 안 되면 박박 바가지나 긁힐 일이지만 술이 안 되면 무흥무취의 청맹과니 밥은 십 리를 가게 하지만 술은 붕붕 날아 백 리 천 리도 가게 하는 것 밥이 보고프면 배 하나 고달프지만 술이 보고프면 천심만신이 고달픈 것 술을 기다리면 술술 흘러 들어오지만 밥은 부지런히 내달려 거머쥐는 것 그게 무어라고 구박만 심해진 술 그래도 마냥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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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시(詩)/최영철 2016. 7. 15. 00:27
뙤약볕 하늘 아래 땀 흘리며 한순간이나마 그대 더 붙잡으려고 고개 들다 개금질 하다 돋아난 칼 끝 비죽비죽한 손길 부디 보시기나 할지 그대 가신 뒤에나 피워 낼 홀로 된 그리움이 치밀어 오른 머리 끝 엷은 꽃망울. 어이 아시기나 할지 꿈꾸면 그대 부르게 될까봐 꿈 깨면 애타게 목마른 그리움 날아갈까 봐 잠들지 못하네 그대 간 빈자리 마주보며 엉기는 가을 겨울 봄, 여름 꿈 안에 꿈 밖에도 듣지 못하고 비몽사몽 바라보다 고개 숙인 달빛 하얀 그늘 (그림 : 김종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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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의기양양시(詩)/최영철 2016. 5. 20. 21:25
희망의 섬 그래도를 발견한 김승희 시인의 뒤를 쫓아 나도 섬 찾기에 나선 것이었는데 새 섬은 못찾고 그래도에 의지해 망망대해로 나아가다 나도 너도 누구도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오대양 너머 출렁이고 있는 또 다른 바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너머 의기양양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름 바뀌는 울어도 웃어도 죽어도 살아도 너머 가도 가도 다 못 갈 섬 헤아릴수도 끝이없어도 너머 조금 살다 내버린 쌍둥이섬 아마도 아직도 지나 오대양 육대륙 너머 마침내 모습 드러낸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 의기양양 막무가내 떼쓰는 이웃집 막내 머리맡에 가끔 출렁이던 바다 의기양양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는데 육안으로도 항공사진으로도 포착되지 않아 아직 사람들 마음속에나 출렁이고 있다는 바다 세상에서 가장 높고 넓은 바다 의기양양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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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연탄시(詩)/최영철 2015. 7. 20. 01:21
왜 나에게만 달려드는 것이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분을 삭이지 못해 뭐라고 숨막히는 함성을 내지르는 것이냐 왜 이리 오래 타는 것이냐 떨리는 내 몸에 기대어 뜨거운 날개를 말리는 것이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풀풀 날려서 왜 내 안을 하얗게 후벼파는 것이냐 가슴이 한꺼번에 막히도록 뜨거운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냐 그렇게 오래 찰떡 궁합이 되고도 아직 붙어먹을 게 남은 것이냐 온몸의 기운 다 빠져나가 백발이 되고도 왜 껴안은 가슴 풀지 못하는 것이냐 너 말고는 이제 더 이상 붙어 먹을 게 없는데 들끓는 날개 달아 승천할 게 없는데 그렇게 오래 불태우고도 그렇게 오래 앗아가고도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이냐 떨며 선 오랜 서성임들을 주저앉히는 것이냐 누가 걷어차면 흥에 겨워 저리 산산이 신명을 다해 부서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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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쉰시(詩)/최영철 2015. 7. 20. 00:51
어두침침해진 쉰을 밝히려고 흰머리가 등불을 내걸었다 걸음이 굼뜬 쉰, 할 말이 막혀 쿨럭쿨럭 헛기침을 하는 쉰, 안달이 나서 빨리 가보려는 쉰을 걸고넘어지려고 여기저기 주름이 매복해 있다 너무 빨리 당도한 쉰, 너무 멀리 가버린 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까봐 하나둘 이정표를 심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댈까봐 고랑을 몇 개 더 냈다 그사이 거울이 게을러졌다 빈둥빈둥 거울이 몰라보게 늙었다 침침하게, 쉰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눈을 찡그리고 있다 저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고함을 내지르고 있다 뿌리치고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눈이 자꾸 어두워져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보다 못한 거울이 흰머리를 하나씩 뽑아주고 있다 (그림 : 최광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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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촛불에게시(詩)/최영철 2014. 11. 17. 16:51
누가 빌다 간 꺼진 촛불에 불붙이며 저에게는 한 푼도 복을 주지 마시라고 빕니다. 찬란한 환희의 속세만 있어도 행복이오니 제발 복이 있으시거든 손톱만큼이라도 촛불에게, 땅에 내려앉지 못해 하늘을 넘보는 다만 눈물로 포효하는 촛불에게 주소서. 다시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이미 주신 복락을 다 쓰기에도 불행이오니 작은 바람에도 가물거리는 여린 소망을 보소서. 두 개나 뚫린 눈을 캄캄한 촛불에게, 두 개나 열린 귀를 우두커니 앉은 촛불에게, 두 개나 뻗은 손바닥을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촛불에게, 천 갈래 만 갈래 펄럭이는 마음 거두어 촛불에게 주소서. 당신의 손길로 끄신 이 촛불은 아무리 그러셔도 한 번 토라지지 않고 불붙이면 또 불붙습니다. 다 타버릴 때까지 타야겠다고 다시 심지를 세웁니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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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 서해까지시(詩)/최영철 2014. 11. 17. 16:47
늦은 아침 깨우며 이부자리 들치는 머리 위의 해 오늘은 저걸 따서 구워 먹는 것이다 반 접어 그 사이 눌러두면 노릇노릇 저물어 갈 붉은 뺨 치즈나 설탕 같은 거 바르지 말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변산반도 곰소쯤 잘 익은 붉은 해 한 덩이 호호 불어 막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소금밭이 늘어뜨린 혓바닥이 먼저 와 꼴딱 삼킨다 물이 다 달아난 까실한 오후 바다가 바닥을 칠 때까지 중참 한번 내오지 않은 하늘이 난 모르는 일이라고 문을 쾅 닫고 간다. (그림 : 이금파 화백)